[기고③] 천도교와 3.1운동 : 독립선언서가 나오기까지

비폭력 무저항주의 정신 반영…기적과도 같은 탄생

이현재 기자 | 기사입력 2019/02/25 [11:19]

[기고③] 천도교와 3.1운동 : 독립선언서가 나오기까지

비폭력 무저항주의 정신 반영…기적과도 같은 탄생

이현재 기자 | 입력 : 2019/02/25 [11:19]
▲ 독립선언서가 나오기까지의 과정은 정말 험난했다.

 

독립선언서에 대해서는 1919년 1월 하순 최린, 최남선, 현상윤이 회합하여 독립운동의 기본방향을 논의할 때 선언서 작성의 필요성이 인정되어 작성자를 물색하게 되었다. 이때 최남선이 “나는 내 생애를 통하여 학자생활로 일관하려고 이미 결심한 바 있으므로 독립운동 표면에는 나서고 싶지 않으나 독립선언서만은 내가 지어볼까 하는데 그 작성상의 책임은 최형이 져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최린은 그의 문장력을 인정해온 터라 그의 심정을 이해했다. 다만 의암 손병희선생께서 부탁한 비폭력 무저항주의 정신을 반드시 선언서에 반영하도록 부탁하고 선언서의 골자는 최린이 말하는 취지와 최남선의 생각을 서로 논의해서 기초하였다. 그 후 최남선은 일본정부, 귀족원, 중의원, 조선총독부에 보내는 통고서와 미국대통령 윌슨에게 보내는 청원서, 파리강화회의 각국 위원에게 보내는 서한도 작성하기로 하고 우선 2월 15일 독립선언서를 작성 완료하여 최린에게 수교하였다. 최린은 초고를 읽어본 후 오세창, 권동진에게 보내어 검토한 후 기독교 측에도 보내어 동의를 얻었다. 그 후 한용운은 독립운동에 직접 책임을 질 수 없다는 최남선에게 선언서를 작성케 함은 불가한 일이니 선언문은 자기가 짓겠다고 주장한 일이 있었으나 최린은 이를 거절하였다.

 

독립선언서 원고는 최남선의 신문관에서 조판한 후 보성사 사장인 이종일에게 넘겨져 사원과 직공들이 퇴근한 후 신임할 수 있는 공장 감독 김홍규, 총무 장효근, 직공 신영구, 그리고 기초자인 최남선 입회하에 2월 20일부터 인쇄에 들어가 25일까지 1차로 25,000매를 인쇄하여 신축 중인 천도교대교당으로 운반하여 은닉하고 미리 정한대로 암호인 청색지를 가지고 오는 사람에게 분배하였다. 천도교에서는 안상덕이 3,000매를 수령하여 강원도와 함경남북도 방면으로 출발하였고, 이경섭은 1,000매를 가지고 황해도 방면으로 출발하였다. 김상설은 3,000매를 인수하여 평양교구에 1,500매를 넘겨 평남지역에 배포한 후 나머지 1,500매를 평북지역에 배포하였다. 인종익은 3,000매를 인수하여 전라남북도를 거처 충청도지역에 배포하였다. 기독교 측에서는 김창준이 3,000매를 수령하여 평양과 선천지방에 배포했고, 이갑성도 2,000여매를 인수하여 서울시내와 경상도 지방에 배포했다. 불교 측에서는 한용운이 3,000매를 인수하여 주로 경상도 지방과 서울 일원에 배포했다.

 

2월 27일 밤 부족한 선언서를 추가 인쇄하기 위하여 이종일은 야간에 등불이 외부에 새어나가지 않도록 공장 내 창문을 모두 가리고 인쇄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한밤중에 한창 인쇄가 진행되고 있을 때 갑자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즉시 작업을 중단하고 인쇄한 선언문을 치우려 하였으나 문 두들기는 소리와 함께 문을 열라는 고함이 빗발쳤다. 모든 것을 각오한 이종일은 큰 기침을 하며 문을 열었다. 신승희였다. 그는 독사처럼 음흉하고 생쥐처럼 날센 종로서의 한인 형사였다. 수없이 많은 애국동포가 그의 손에 검거되어 무참히 고문을 당하게 한 악명 높은 민완 형사였다. 이종일은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애원하였다. “하루만 지나면 모든 것이 드러날 터이니 오늘 하루만 눈감아 주십시오.” 두 손으로 빌며 읍소하였다. 관내를 순시하던 그자는 보성고보의 뒷담 골목을 지날 때 인쇄소 안에서 여느 때와는 달리 창문을 굳게 가리고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를 듣고 문을 두들긴 것이다. 실내를 돌아보고 사정을 알아차린 그는 가만히 무엇인지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종일은 다시 그의 소매를 붙들고 사정하였다. “차라리 나를 죽이시오. 이것만은 막지 못합니다.” 평소에 자주 들려 농담도 곧잘 하던 그자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말이 없었다. 이종일은 다시 그의 옷소매를 끌며 “우리 성사님한테 같이 갑시다.” 하였더니 뜻밖에도 “당신이 갔다 오시오.”라고 했다. 이종일은 곧 밖으로 나와 성사 댁으로 달려가 위급상황을 보고 하였다. 묵묵히 듣고 있던 성사께서 좀 기다리라면서 안방으로 들어간 후 잠시 있다가 종이뭉치를 가지고 나왔다. “이걸 가져다주시오. 밤늦게 수고가 많습니다. 아무쪼록 잘 무마해서 일을 처리하도록 하시오.” 인사할 겨를도 없이 인쇄소로 돌아온 이종일은 신승희에게 종이뭉치를 꺼내 주었다. 그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면서 곧 사라졌다. 이종일과 김홍규는 일시에 맥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아무쪼록 저자가 배신하지 않기를 기도하며 다시금 힘을 내어 작업을 계속하였다. 10시가 넘어 일만 매의 독립선언서가 추가로 인쇄되었다. 인쇄된 독립선언서를 리어카에 실어 경운동 신축교당 창고에 갔다 숨겨놓고 성사에게 가서 무사히 인쇄를 마치고 운반해 두었다고 보고하였다.

 

종로서 한인형사 신승희는 성사로부터 5천원의 거금을 받고 3·1운동이 발발할 때까지, 아니 그 이후에도 신의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는 5월 초순에 종로서 사법주임과 함께 만주 봉천에 출장 갔다가 5월 14일 귀환하였는데 서울역 구내에 대기하고 있던 헌병에게 체포되어 구치소에 수감되자 그날 밤 준비했던 독약을 먹고 자살하였다. 출장 중 직무유기와 뇌물수수 혐의가 탄로된 것이다. 갖가지 악행으로 조국과 민족을 배반했던 그가 40세를 일기로 마지막에 민족적 양심에 따라 애국의 길을 택했던 것이다. 이종일은 재판에서 독립선언서는 2월 27일 밤 21,000매를 인쇄하여 2월 28일 아침 오세창의 지시대로 7, 8인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이종일선생 논설집에 의하면 독립선언서는 2월 20일에서 25일까지 25,000매를 인쇄하여 각지에 배포하였다. 3월 1일 만세시위를 시작한 서울을 비롯해서 개성, 부산, 대구, 평양, 신의주, 원산 등 10여 곳에서 동시에 봉기한 것을 보면 독립선언서는 2월 25일에 25,000매를 인쇄하여 먼 곳부터 배포하고 부족분 10,000매를 27일 인쇄한 것이 분명하다.

 

독립선언서에 대한 민족대표의 서명은 2월 27일 밤 재동 최린의 집에서 이루어졌다. 기독교를 대표해서 이승훈, 이필주, 함태영이 그리고 불교 측 대표로 한용운이 참석했다. 천도교에서는 대표들이 김상규의 집에 모여 도장을 모아 최린에게 보내왔다. 이 자리에서 독립선언서와 기타 청원서 등에 기명날인하려 하였으나 선언서 외의 여타 문서가 미비되어 별지에 서명하고 그 밑에 날인토록 하였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서명자의 순위를 어떻게 정할 것인가에 대하여 의견이 분분하였다. 기독교 측에서는 연령순이나 가나다순으로 하자고 제의하였다. 세 교단 중에 종교적으로 기독교가 우위를 차지하겠다는 뜻이다. 천도교 측을 대표한 최린은 이를 그대로 찬성할 수 없었다. 가나다순이나 연령순으로 서명하게 되면 선생보다 제자가 먼저 기명할 수 있기 때문에 천도교의 체제상 곤란하다고 완곡히 설명하였으나 양측 주장이 맞서서 쉽게 타협을 이루지 못했다. 이에 최린은 “그러면 이 순간까지 서로 노력해온 일은 파기할 수밖에 없다.”고 강경한 태도로 나왔다. 이때 최남선은 “인물로 보아서나 거사의 동기로 보아서도 손병희 선생을 영도자로 모시고 첫 번째로 서명하는 것이 타당한 듯하다.”고 기독교 측에 양보할 것을 권하였다. 이에 이승훈의 제의에 따라 두 번째는 장로교를 대표해서 길선주 목사가 서명하고, 세 번째는 감리교를 대표해서 이필주 목사를, 그리고 네 번째는 불교를 대표해서 백용성이 서명한 후 그 다음은 가나다 이름순으로 서명하기로 의견이 일치되어 기명날인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거사일은 3월 1일 오후 탑동공원으로 결정하고 2월 28일 밤 가회동 성사님 댁에서 대표자 전원이 회동하여 거사를 위한 마지막 모임을 갖도록 약속하였다.

 

28일 오후 5시 가회동 성사님 댁에 민족대표 23명이 모여 서로 인사를 나눈 후 의암 손병희선생은 간단하게 인사말을 했다. 이 자리에서 박희도는 탑동공원에서 독립선언을 하게 되면 다수의 학생이 동원되어 모일 것이니 이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다고 했다. 논의 결과 탑동공원에 많은 학생과 군중이 모이게 되면 군중심리에 의해 불상사가 생길지도 모르고 이로 인해 일본군경에게 악독한 탄압수단을 제공할 수도 있기 때문에 민족대표들은 그 근처 명월관 지점인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을 하는 것으로 장소를 변경하기로 했다. 

 

기고자/천도교 교화관장 김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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