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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④] 천도교와 3.1운동 : 천도교 선열들 희생, 상해임시정부로 연결되다
천도교 중앙대교당 통한 상해임시정부, 대한민국 독립 전초기지로
 
이현재 기자
▲ 3.1운동을 통해 만들어진 독립의 물결에 천도교가 중추적인 역할을 맡았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1919년 2월 28일 오후 5시 가회동 성사님 댁에 민족대표 23명이 모여 서로 인사를 나눈 후 의암 손병희선생은 간단하게 인사말을 했다. 이 자리에서 박희도는 탑동공원에서 독립선언을 하게 되면 다수의 학생이 동원되어 모일 것이니 이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다고 했다. 논의 결과 탑동공원에 많은 학생과 군중이 모이게 되면 군중심리에 의해 불상사가 생길지도 모르고 이로 인해 일본군경에게 악독한 탄압수단을 제공할 수도 있기 때문에 민족대표들은 그 근처 명월관 지점인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을 하는 것으로 장소를 변경하기로 했다. 

 

3월 1일, 민족적 거사가 이 순간에 이르기까지 왜경에게 발각되지 않고 순조롭게 진행된 것은 참으로 기적 같은 일이었다. 일본 학자들도 이것은 당시 왜경의 정보력으로 볼 때 불가사의한 일이었다고 말한다. 최린은 이날 아침에 대문 안에 독립선언서 두 장이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 서울시내에 배포되었음을 확인한 후 서둘러 성사 댁으로 가서 시중의 동향을 보고하고 권동진, 오세창과 함께 성사를 모시고 12시경 인력거로 약속장소인 명월관 지점 태화관에 도착했다. 최린은 주인 안순환에게 30여명분의 점심을 부탁하고 별실에 일동은 자리를 잡았다. 민족대표들은 오후 1시가 넘자 대부분 모였다. 탁자 위에는 나용환이 가져온 100여 매의 독립선언서가 놓여 있었다. 일동은 감격에 떨리는 손으로 각기 선언서를 들고 묵묵히 읽어 내려갔다. 1시 반이 넘어서자 민족대표 33인중 길선주, 유여대, 김병조, 정춘수 4명이 불참하고 전원이 모였다. 이에 성사께서 이종일에게 직접 독립선언서를 인쇄해서 배포했으니 크게 낭독하라고 지시하여 이종일은 인쇄된 독립선언서의 오자를 고치고 낭독하였다. 낭독이 끝나자 의암성사는 최린에게 경무총감부에 전화로 이 사실을 통보하도록 지시하고 일동에게 민족대표로서 당당히 행동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때 탑골공원에 모인 수만 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독립선언 장소가 변경된 것을 뒤늦게 알고 학생대표 강기덕, 김원벽, 한위건 등 10여 명이 태화관으로 달려와 민족대표에게 장소변경을 항의하고 탑골공원으로 갈 것을 강력히 요구했으나 권동진과 최린이 장소변경의 사유를 말하고 간곡히 타일러 돌려보냈다. 식탁이 열리자 한용운은 자진해서 일어나 일장 연설을 하였다. 국제정세의 추위는 바야흐로 조선민족에게 독립을 허용하게 되었다는 점, 그리고 그동안 우리 민족은 간악한 일제의 쇠사슬을 풀고 자유천지를 향해 궐기하기 위한 힘을 구축하였다는 점, 따라서 우리들의 이 모임은 민족독립의 성사를 뒷받침 하는 의미 깊은 일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요지였다. 일동은 기립하여 조선독립만세를 삼창하였다. 이와 거의 동시에 탑동공원에 모인 군중의 조선독립만세를 제창하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는 듯 들려왔다.

  

오후 3시가 지나자 정복경찰 7~80명이 몰려와 태화관을 포위하고 일인 경부가 최린을 불러 경시총감부로 연행한다고 하자 차를 준비하라고 하였다. 30분 후에 차 한 대가 도착해서 첫 차에 의암성사를 비롯해서 한차에 세 분씩 연행하였다. 5시가 지나서야 최종으로 최린과 한용운이 연행되었는데, 그때 시내는 일본군이 배치되어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었다. 한편 전부터 긴밀한 연락을 취하고 있던 중등 이상 각 학교 학생들은 전날의 지시에 따라 오전 수업을 마치고 1시쯤부터는 속속 탑동공원으로 모이기 시작하였다. 2시쯤에 이르러서는 이들 학생의 수는 4, 5천명을 헤아리게 되었고, 그때 경신학교 졸업생인 정재용이 단상에 올라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 시작하였다. 선언서가 낭독되자 흥분과 감격에 상기된 군중들은 일시에 숙연해졌다. 독립선언서 낭독이 끝날 무렵 감격에 넘친 군중들의 대한독립만세 소리가 일시에 터져 나왔다.

 

탑동공원에서 학생들과 합류한 수만 명의 시민들은 어느덧 서울 시내를 누비며 독립만세의 시위행진으로 돌변하였다. 탑동공원에서 시작된 수십만 군중의 시위행진은 해가 저물도록 계속되었다. 온 시가는 철시하고 시위군중의 대열이 물결치는 가운데 일제는 전 경찰력과 보병 3개 중대, 기병 1개 소대를 시내 요소에 배치하여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었다. 시위대열의 수에 압도당한 일제는 처음에는 방관하는 듯하였으나 해질 무렵부터 시위 군중을 해산하기 시작하였다. 적수공권으로 독립을 외치는 시위행렬은 점차 일제의 저지선에 부딪쳐 주모자급이 속속 구속되었으나 독립만세의 함성은 전시내로 번져가면서 밤에는 횃불이 등장하고 태극기가 곳곳에 꽂혀 있었다.  

  

서울에서 시작된 독립만세의 함성은 삽시간에 전국에 퍼져 방방곡곡에 메아리쳐 나갔다. 3월 1일 만세시위가 시작된 것은 서울만이 아니었다. 개성, 수원, 평양, 진남포, 안주, 선천, 의주, 대구, 부산, 원산, 홍원 등 11개 시·군에서 서울의 거사와 때를 같이 했다. 다음날에는 해주, 연안, 황주, 중화, 강서, 대동에서 일어났으며, 5일까지는 경기 이북지역에서 시위를 계속하였다. 5일에는 군산, 벽동, 맹산, 영변에서 10일에는 철원, 광주에서 궐기하였고, 점차로 전국으로 확대되어 갔다. 천도교와 기독교의 교회조직이 있는 곳부터 터져 나온 독립만세의 시위행진은 요원의 불길처럼 방방곡곡에 전파되어 우리나라 최남단인 제주에서는 3월 20일에, 최북단인 은성에서는 4월 4일에 각기 봉기하였다.

  

이러한 만세시위는 국내에서 뿐만 아니라 3월 6일에는 서간도에서 7,200여명이 시위하였고, 13일에는 용정에서도 독립선언대회가 개최되었다. 비폭력 군중의 평화적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일제는 전투태세를 갖춘 2개 사단의 정규군과 치안을 담당하고 있는 헌병 2만 명, 이밖에도 경찰과 한인 헌병보조원 수만 명을 분산 배치하였다. 일제는 독립만세를 부르는 시위 군중을 잔인하게 진압하였다. 시위 군중에 대한 발포는 물론 이들을 집단학살한 사례가 허다하였으며, 특히 평북의 정주, 평남의 맹산, 양덕, 황해도 수안, 그리고 수원 제암리 등지에서는 수십 명이 무자비하게 학살되었다. 또한 구속된 시위자에 대한 고문 역시 잔인무도하였다. 수많은 시위자들이 혹독한 고문으로 생명을 잃거나 불구자가 되기도 하였다. 일제에 의하여 집계된 3월 1일부터 5월 말까지의 시위운동에 참가한 인원과 그 피해상황은 다음과 같다.

 

집회건수 1,542회, 집회인원 2,023,098명, 사망자 7,509명, 부상자 15,961명, 구금자 46,948명, 소실된 교회 47동, 소실된 학교 2동, 소실된 민가 715동. 

 

이러한 희생의 대부분은 천도교인들과 천도교당이었음은 당시의 교세로 볼 때 분명하다. 기독교와 불교는 당시에 각각 30만 교도에 불과했었다. 이와 같이 기미 3·1독립운동은 일제의 잔인한 학살과 무자비한 탄압으로 독립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하였다 할지라도 일제에 대해 경종을 울리게 함으로써 그 후 일제가 야만적인 무단통치를 바꾸어 소위 문화정치라는 통치방법으로 변경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이상이 천도교에서 기독교, 불교와 함께 전개했던 3.1독립운동의 전말이다. 이러한 세계역사에 길이 남을 3.1독립만세운동이 가능했던 것은 천도교에서 의암 손병희선생의 지도 아래 10년 가까이 정신무장에서 독립운동자금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준비해온 덕택이었다. 천도교에서는 독립운동자금 모집을 위해서 300만 교도에게 한 가구당 10원 이상씩 중앙대교당 건축성금을 걷었는데 그 금액이 무려 500만원(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5,000억 원에 상당하는 금액)에 가까웠다. 이 돈의 상당부분은 왜경에 의해서 압수되었지만 나머지 돈은 상해임시정부를 비롯해서 무장투쟁을 위한 독립운동자금으로 공급되었다. 김구선생이 임정요원들과 함께 광복 후 귀국해서 맨 처음 찾은 곳이 서울 우이동 봉황각 경내에 있는 의암 손병희선생 묘소였다. 그리고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열린 김구선생의 귀국보고대회에서 김구선생이 한 다음과 같은 말은 3.1운동과 관련한 천도교의 역할을 웅변적으로 증명해주고 있다. “3.1운동이 아니었으면 임시정부가 없었고, 의암이 없었으면 3.1운동도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천도교가 없었다면 중앙대교당이 없고, 중앙대교당이 없었다면 상해임시정부가 없고, 상해임시정부가 없었다면 대한민국 독립이 없었을 것이다.”

 

이상과 같이 3.1운동과 관련하여 천도교와 의암성사의 공적은 가장 큰데 3.1운동 100주년을 맞아하고 있는 오늘, 진실을 왜곡하거나 외면하고 있는 대한민국 역사학계나 정치계의 현실이 매우 안타깝다. 오늘날 정부에서 주관하는 3.1절 기념식에서 손병희선생이나 천도교 선열들의 숭고한 희생은 단 한마디도 언급되지 않지만 다른 인사들의 이름은 거론되고, 국가에서 건립한 ‘백범김구선생기념관’은 있는데 국가에서 건립한 ‘의암손병희선생기념관’은 아직도 없다는 것은 대한민국 정부가 크게 잘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기고자/천도교 교화관장 김호성


기사입력: 2019/02/27 [11:19]  최종편집: ⓒ 뉴민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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