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의 성골 김형오 국회의장의 양심

<채수경 칼럼> 김형오 국회의장의 우산지목(牛山之木)

채수경 | 기사입력 2009/01/05 [10:17]

한나라당의 성골 김형오 국회의장의 양심

<채수경 칼럼> 김형오 국회의장의 우산지목(牛山之木)

채수경 | 입력 : 2009/01/05 [10:17]
자기의 존재 및 행위에 관해 선악을 감지하고 재정하는 직각적인 작용을 양심(良心, conscience)이라고 한다. 좋을 량(良)의 자원(字源)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원형이나 네모꼴 움집과 그 아래위로 길이 난 모습을 그린 것으로서 ‘집 즉 인간의 몸과 마음이 기거하는 곳으로 통하는 길을 그린 것’이라는 설이 설득력을 얻는다. 그래서 ‘좋다’라는 의미도 생겨났다. 반면 영어 ‘conscience’의 뿌리는 ‘함께’를 뜻하는 접두사 ‘com-’과 ‘알다’라는 의미의 ‘scire’가 붙은 라틴어 ‘conscire’로서, 더불어 사는 세상에서 너와 내가 함께 인정하는 가치를 지향하는 것을 말한다. ‘良心’이 선천적·인본주의적이라면 ‘conscience’는 후천적·관습적이라는 행간이 읽혀진다. 
 
목전의 이익 때문에 양심을 저버리는 것을 께름칙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맹자(孟子) 중 고자(告子) 상편에 등장하는 민둥산 우산(牛山)에 자주 올라가봤을 것이다. 우산(牛山)은 제나라 수도 임치 남쪽 교외에 있는 산, 제나라 경공이 재상 안영과 함께 올라가 나라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다는 바로 그 산, 그 때만 해도 초목이 무성하여 매우 아름다웠으나 200년 뒤쯤 맹자가 제나라에 체류할 때는 나무 한 그루 없는 민둥산으로 변해 있었다. 그래서 맹자는 말한다. 우산의 수목은 본디 아름다웠으나 큰 나라의 서울에 인접해 있는 까닭에 사람들이 도끼로 마구 베어내었고, 비와 이슬이 내려 잘린 나무의 뿌리에서 새싹이 돋아나긴 했지만, 그 마저 소나 양들이 와서 뜯어먹어 민둥산이 되고 말았다.
오늘날 사람들은 우산을 보고 원래부터 나무가 없었을 것이라고 여기지만 어찌 저렇게 헐벗은 모습이 우산의 본래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사람이 자기의 양심을 저버리는 것 또한 우산의 나무를 도끼로 베어내는 것과 같은 바, 매일 잘라버리니 어찌 아름다울 수가 있겠는가? 결국은 짐승처럼 변해버리지만 그게 사람의 본성은 아니잖은가? 
 
한나라당 출신 김형오 국회의장이 기축년 새해를 맞아 우산에 올라가 맹자를 읽고 온 것 같다. 한나라당이 방송을 재벌 및 족벌언론들에게 넘겨주려는 법안을 밀어붙이고 있는 가운데 김 의장이 관련 법안을 직권 상정해달라는 한나라당의 당연한(?) 요청을 정면으로 무시한 채 “며칠 전 여야 협상 대표가 ‘가(假) 합의안’을 마련한 적이 있는 데서 보듯 조금만 더 노력한다면 여야가 합의를 못할 이유가 전혀 없다”며 “이번 임시국회에서는 직권 상정을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환영한다. 김 의장의 결단이야말로 ‘양심의 결단’이라는 칭찬이 아깝지 않을 것 같다.
경남 고성군 출신으로서 서울대를 나와 정의를 바로 세워보겠다고 동아일보 기자로 사회 첫출발을 시작했으나 속세에 물든 많은 선배들이 그러했듯이 권력을 좇아 국무총리·대통령 정무 비서관을 지낸 후 지난 1992년 14대 총선 때 민자당 공천으로 당선된 이래 내리 4선을 한 한나라당의 ‘성골’이 한나라당 정책에 반기를 드는 게 쉽지 않았을 터, 친일파 및 박정희-전두환-노태우 독재의 전통이 유구한 한나라당에도 그런 인물이 있다는 게 신기하여 맹자의 ‘우산지목(牛山之木)’이 떠올려지기도 한다. 
 
김 의장의 양심적인 결단에 양심 산이 민둥산(?)이어서 막말과 술자리 추태 등으로 국회의원 자질 시비를 불러 일으켜온 주성영 한나라당 의원은 즉각 ‘김형오 의장 참 한심하다’는 제목의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김 의장의 자진사퇴를 주장했지만 지난 해 4월회 초청 강연회에서 “서울법대 4학년 재학 중이던 4·19 혁명 당시 출세를 위해 고시를 준비 중이었고 행동을 한 것이 별로 없었다. 4·19 기념일이 올 때마다 내 자신에 대한 엄청난 회한과 모멸감이 떠나지 않았다”고 양심고백을 했던 박희태 한나라당 대표는 속으로 빙그레 웃을 것 같다. 남들보다 잘 먹고 잘 살아보자는 욕심 때문에 정의를 외면하고 지역주의 권력에 편승하여 이익을 도모해오면서 추하게 변해버린 사람들에게도 양심은 있다는 것을 누구라서 부인하랴. 정경(政經)유착과 권언(權言)유착으로 나라가 병드는 데도 못 본 척 일신의 영달을 위해 흑(黑)을 백(白)이라고 우기는 사람들 또한 혼자 있을 때는 우산(牛山)에 올라가 엄청난 회한과 모멸감을 곱씹으며 눈물 흘릴 것임을 믿어마지 않는다.
 
<채수경 / 뉴욕거주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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