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천태왕의 장모에서 연인이 되는 신라의 김옥모 태후

가장 고매한 사랑을 했던 김옥모 태후와 고구리 중천태왕

한영수 컬럼 | 기사입력 2014/10/29 [23:37]

중천태왕의 장모에서 연인이 되는 신라의 김옥모 태후

가장 고매한 사랑을 했던 김옥모 태후와 고구리 중천태왕

한영수 컬럼 | 입력 : 2014/10/29 [23:37]
우리는 흔히 ‘역사적인 세기의 사랑’하면 이집트 클레오파트라와 로마 안토니우스의 사랑을 들곤 한다. 우리 역사에 그들보다 더 뜨겁고 격이 높은 사랑이 있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고구리 중천태왕과 신라의 옥모태후와의 국경을 넘나든 사랑이야기이다. 지금부터 <고구리사초·략>을 인용해 역사상 가장 고매한 그들의 사랑을 상세히 소개하고자 한다.
  
신라의 11대 왕 조분이사금과 12대 첨해이사금의 어머니인 김옥모(金玉帽) 태후는 고구리 중천태왕과 늦깎이 사랑을 불태우는 여인이다. 늦사랑을 나누던 중 신라에서 첨해이사금이 갑자기 죽자 자기 친정동생인 김미추를 신라의 13대 왕으로 만드는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물론 그러한 힘의 원천은 상국인 고구리의 중천태왕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김옥모는 중천태왕과의 사이에서 달가(達賈)라는 아들을 낳는데, 달가는 서천태왕 11년(280)
숙신의 침략을 물리치고 항복을 받아 복속시키는 빛나는 전공을 세워 안국군(安國君)으로 봉해지고 내외병마사를 맡고 겸하여 숙신·양맥을 다스리게 되는 인물이다. 서천태왕의 뒤를 이은 봉상왕은 백성들에게 신망이 두터운 숙부 안국군 달가를 두려워한 나머지 즉위하자마자 죽여 버린다. 자신의 황위를 위협할 수 있는 가장 큰 정적을 제거한 것이다.
 
중천태왕의 장모에서 연인이 되는 신라의 김옥모태후
 
중천태왕 4년(251) 신라의 첨해(沾解)이사금이 누이 정(精)을 고구리 중천태왕에게 후궁으로 바치자 처음에는 차와 술을 시중드는 궁인인 다의(茶儀)로 삼는다. 이듬해 가을 8월, 본시 고구리의
풍습이었으나 나중에 신라의 풍습이 되는 월가회(月歌會=달놀이) 때 태왕이 처음으로 참석해
정을 월선(月仙)으로 삼는다.
10월 첨해가 옥모태후와 함께 국경에 와서 입조(入朝)하니, 태왕이 전태후와 월정을 데리고 나가 하상(河上)에서 이들을 맞이한다. 여기서의 하상은 바로 황하 위를 말하는 것으로 당시 고구리와 신라의 국경이 황하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중천태왕은 이들을 위해 사흘간이나 크게 잔치를 베풀어준다.
 
첫눈에 옥모태후의 반한 중천태왕은 옥모에게 치렁치렁한 담비가죽 옷과 금팔찌・옥귀걸이・
향합・진주머리장식・백옥목걸이・백마 등 40십여 가지를 선물한다. 하례 후 첨해가 돌아가려 하자 태왕은 옥모의 손을 부여잡고는 눈물로 이별을 아쉬워하며 옥모를 친히 부축해 수레에 오르게 한다. 그리고는 신라에게 죽령(竹岺) 땅을 되돌려준다.
 
이듬해 봄 정월 중천태왕은 옥모태후에게 인삼・감초・물개배꼽・낙타를 보내주며 “백옥루(白玉樓)에서 다시 만나고 싶습니다”라는 은밀한 글을 손수 적어 넣었더니, 신라사람들이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해 백옥루를 지어 태왕을 맞이하고자 고구리에 와서 옥을 빌려갔다고 한다. 여기서의 낙타는 고비사막 부근에 사는 쌍봉낙타로 더운 사막지대에 사는 단봉낙타와는 다른 종이다. 즉, 고비사막 지역이 고구리의 강역이었다는 말인 것이다.
신라에서 칼과 칼집을 만드는 대장장이 12명을 보내니, 중천태왕은 명을 내려 이 대장장이들을
 5부에 나누어 보내 칼 만드는 시범을 보이게 했다. 지난해 황하 위(河上)에서 첨해와 옥모를 만났을 때, 태왕은 신라사람들의 칼과 갈래창(戟)이 정교하고 날카롭다는 것을 보고는 첨해에게 보내라고 명해 지금 도착한 것이다.
 
 ▲ 선물로 준 쌍봉낙타의 서식지는 고비사막 부근으로, 당시 고구리의 강역이었다. <사진/이미지=필자제공>

그해 4월 중천태왕이 사신을 보내 옥모태후에게 일상적인 안부를 묻고는 황금 5백 냥과 비단・
명주 각 100필, 양 5000마리를 보내주자, 이 달에 옥모가 거처하는 궁의 동쪽 연못에서 용이 나타나고 금성(金城)의 누운 버드나무가 저절로 일어섰다고 적혀있다. <삼국사기>에는 “첨해이사금
 7년 여름 4월 용이 대궐 안 동쪽 못에 나타났다. 금성 남쪽에 있는 쓰러졌던 버들이 저절로 일어섰다”고 그 사연을 못 알아보도록 생략되어 간단히 적혀 있다.
 
옥모가 친히 태왕에게 글을 올리기를 “예전에 저의 월백선황(月白仙皇)께서 두 물고기가 끄는
가마를 타고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시면서 꽂아놓은 지팡이가 꽃을 피워 지금까지 끊이지
않고 있사온데, 지난해 꿈속의 가르침대로 폐하를 섬겼다가 크고 두터운 베푸심을 얻어서
죽령(竹岺) 땅이 신첩의 탕읍(湯邑)이 되었읍니다”라고 했다.
 
탕읍의 원어는 탕목읍(湯沐邑)으로 중국 주나라 때 황제가 제후에게 목욕할 비용을 마련하도록 내린 땅을 말한다. 제후가 황제를 만날 때에는 뜨거운 물에 몸을 깨끗이 씻어야 했는데, 그 비용을 여기서 마련하라는 의미였다. 후대로 오면서 군주와 그 왕비·왕자·공주 등이 부세를 거두어 관할하는 지역을 의미한다. 즉, 봉건 제후의 봉지를 말하는 것이다.
 
이어 “아버님(김구도)께서는 첨해를 임(臨)하셨고 지아비께서는 신첩을 임하셨는데, 주 왕실에서는 서왕모의 아름다운 연못을 준비한 예법이 있었고, 한 왕실에서는 여치(呂雉)와 묵특(冒頓) 사이의 법도가 있었습니다. 신첩도 마음속으로 원하는 바가 있어서 제 딸을 후궁으로 보내드렸사옵니다. 원하옵건대 황자와 황녀들을 얻으시어 세세토록 장모와 사위로 지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라 했다.
 
여치는 한나라 고조 유방의 부인이다. 유방이 평성(하남성 맹진)의 백등산에서 흉노에게 이레나 포위당하자, 여치가 묵돌 선우에게 치마를 풀어 몸을 바치는 치욕을 당하고 굴욕적인 화친조건을 약속하게 된다. 그 조건이란 상호간 형제관계를 맺고 장성을 경계로 하여 침공하지 않는 대신에, 한나라가 공주와 많은 공물을 흉노에게 바치는 것이었다.
 
 
이에 태왕은 크게 기뻐하며 남쪽을 향해 무릎 꿇고 절하며 이르기를 “내 태후께서는 진정한 성인이시다. 나라에 이 같은 큰 성인이 계시니, 용이 나타나고 버드나무가 일어선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라고 감탄했다.
 
253년 신라에서는 5・6・7월 내내 비가 아니 왔다. 첨해가 자기 조상의 사당에 빌어 비가 내리기
는 했으나, 곡식이 여물지 않아 백성들이 굶고 도적들이 불길같이 일어났다고 <고구리사초·략>
에  적혀 있는데, <삼국사기>에는 같은 내용이 매우 간단하게 적혀있다.
 ▲ 극심한 가뭄으로 저수지가 말라버린 모습 <사진=필자제공>

신라의 상황이 이러하자 태왕은 명을 내려 배 100척을 띄워 보리・조・기장・콩 등 3천 섬을 옥모태후에게 보내며 “모친 곁을 떠난 이래로 더욱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흉년이 들어 많은 백성들이
불을 지피지 못한다고 들었사온데, 어지신 어미의 정이야 지금 어련하시겠습니까! 이에 관리에게 명해 이것들을 보내오니 도움치고는 넉넉지 않은 것이나, 백성들에게 나눠주시면 어떠시겠는지요?”라고 했더니,
 
 옥모가 답하기를 “요임금 9년의 큰 비와 탕임금 7년의 가뭄이 지금은 신첩의 일이 되었습니다.
선황 이래로 백성들은 가멸지게 살아왔고, 또한 폐하의 총애가 있고 용과 버드나무의 상서로움
까지 나타났는데 어찌 요사스러운 재앙이 시샘할 줄이야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신첩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제 부황께서 멀리서 하늘같은 양식을 보내셔서 제 백성들을 구제하셨으니 백골난망이옵니다”라고 화답했다.
 
중천태왕 7년(254) 7월 월정이 태자를 낳아놓고 걱정하기를 “딸을 낳아 평범한 이에게 시집노냄만도 못하옵니다”라 하니, 태왕은 월정이 배척되고 있음을 알아채고는 지위를 황후로 삼아 다섯 후들과 나란히 했더니 군신들도 감히 말리지 않았다고 한다. 장모 옥모태후를 사모하는 마음 때문에 그 딸에게 은혜를 내린 것이었다.
 
이듬해 9월 백제의 고이왕이 신라를 침범하자 신라의 일벌찬 익종이 괴곡 서쪽에서 싸우다가
전사하고, 10월 봉산성까지 공격당하자 옥모가 몸소 국경으로 태왕을 찾아와 구원을 요청하게
된다. 황하 위(河上)에서 그녀를 만난 중천태왕이 장수를 보내 백제군을 공격하자 고이왕이 봉산성의 포위를 풀고 화친을 청했으나 양군은 서로 대치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
 
중천태왕 9년 병자(256) 봄 3월, 태왕이 친히 옥모를 국경에서 전송하니 첨해가 와서 맞이했다.
 사도해(沙道海)에 큰 물고기 셋이 있는데 길이가 3장에 높이가 1장 2척이었더니, 사람들이 성인 셋이 나타날 징조라며 “하늘에는 별 셋이 있고, 땅에는 성인 셋이 있으며, 물에는 물고기 셋이 있다”라고 노래했다. <삼국사기>에는 “첨해이사금 10년 봄 3월, 동해에서 큰 물고기 세 마리가 잡혔는데 길이가 세 길이요 높이가 한 길 두자였다”라고 간단히 적혀 있을 뿐이다.
 
256년 가을 8월 옥모가 국경까지 와서 태왕을 만나 원병을 청한지 10개월 만에 황자 달가(達賈)를 낳으니 태왕이 사신을 보내 옥모를 황후로 삼고 첨해를 황자로 삼았다. 이때 옥모에게서 태어난 아들이 바로 서천태왕 때 침략해온 숙신에게 항복을 받아 복속시키는 빛난 전공을 세워 안국군(安國君)으로 봉해지고 내외병마사를 맡아 겸하여 숙신·양맥을 다스리게 되는 달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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