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①] 천도교와 3.1운동 : 동학의 시천주 사상, 자주독립정신 일깨우다

각박해진 세상을 구할 수 있는 최고의 방도로 자리잡아

이현재 기자 | 기사입력 2019/02/23 [21:30]

[기고①] 천도교와 3.1운동 : 동학의 시천주 사상, 자주독립정신 일깨우다

각박해진 세상을 구할 수 있는 최고의 방도로 자리잡아

이현재 기자 | 입력 : 2019/02/23 [21:30]
▲ 지상천국을 건설하고자 하는 천도교의 정신은 일제강점기를 맞아 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천도교는 보국안민(輔國安民) 포덕천하(布德天下) 광제창생(廣濟蒼生) 지상천국건설(地上天國建設)을 목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종교이다. 보국안민이란 백성이 편안하게 잘 살 수 있도록 나라를 위해서 봉사하라는 뜻이다. 포덕천하란 사람마다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는 시천주(侍天主)진리를 세상에 널리 펴서 세상사람 모두가 사람을 한울님처럼 공경하며 살게 하라는 뜻이다. 광제창생이란 세상 사람들이 시천주신앙을 통해서 도성덕립(道成德立)을 이루어 모든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하라는 뜻이다. 지상천국건설이란 세상 사람들 모두가 한울사람이 되게 하여 이 땅 위에 천국을 건설하라는 뜻이다.

 

조선왕조 말엽 천도교가 창도될 당시에는 서세동점(西世東占)의 시기라서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백성들은 질병과 기아에 시달리며 관리들의 횡포까지 감당해내야 하는 절박한 상황 속에서 각자위심(各自爲心)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이러한 어지러운 세상을 구해낼 새로운 도(道)를 찾아서 고심하던 수운(水雲) 최제우 선생께서 깨달은 진리가 바로 시천주(侍天主) 진리였다. 수운선생은 사람들이 ‘자신이 바로 한울’이란 시천주 진리를 알게 된다면 이 세상의 모든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시천주 진리를 깨닫고 이를 실천하게 되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보국안민을 할 생각을 하게 되고, 포덕천하를 해야겠다는 생각도 하게 되며, 광제창생을 해서 지상천국을 건설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시천주 진리야말로 각박해진 세상을 구할 수 있는 최고의 방도라 생각하고 동학(東學)이란 이름으로 천도(天道)를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이 동학이 오늘날 천도교(天道敎)이다. 즉 천도를 가르치는 학문이 동학이라면 천도를 가르치는 종교는 천도교인 것이다.

 

이처럼 천도교인들은 보국안민(輔國安民)이란 목적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에 나라를 위하는 일에는 기꺼이 목숨을 바쳐왔다. 1894년 갑오년에 일어났던 동학혁명(東學革命)이 그러했고, 1919년 기미년에 일어났던 3.1운동이 그러했다. 동학혁명은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근대적 민주의식을 당시 봉건제도하에서 신음하고 있던 백성들의 가슴속에 처음으로 일깨워주었던 역사적 사건이었고, 3.1운동은 일제의 무단통치하에서 신음하던 백성들의 가슴속에 자주독립정신을 일깨워주었던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러한 사건의 밑바탕에는 항상 동학의 시천주 사상이 자리 잡고 있었다. 천도교인들은 시천주 사상에 위배되는 억압에 대해서는 언제나 힘을 합쳐서 당당하게 저항해 왔다. 이것이 바로 천도교 정신이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 소식을 들은 천도교 3세 교조 의암 손병희선생은 아침조회에서 “내가 앞으로 10년 안에 일본으로부터 반드시 나라를 되찾겠다.”고 말했다. 1911년 봄 고종황제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 이강공(李堈公)은 의암성사를 찾아와 우이동 골짜기에 함께 가자고 했다. 그해 8월에 천도교중앙총부에서는 의암성사의 명으로 우이동 골짜기에 임야와 전답을 3만평 정도 사들였다. 그해 11월부터 수련도장을 짓기 시작해서 1912년 6월 19일 수련도장인 봉황각(鳳凰閣)을 준공했다. 의암성사는 이곳에서 전국의 천도교 두목 483명을 선발해서 1912년 4월부터 1914년 6월까지 3년에 걸쳐서 7차로 나누어 49일씩 이신환성(以身換性) 특별수련을 시켰다. 이신환성이란 육신관념에서 탈피해서 한울님 성령을 주체로 한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하는 데 마음이 이러한 경지에 도달하게 되면 생사(生死)를 초월하게 된다. 이렇게 양성한 지도자들이 자신이 속한 교구에 돌아가서 나라의 독립을 되찾으려면 우리민족 모두가 천도교를 믿어야 한다고 열심히 포덕운동을 전개했다. 그 결과 천도교단은 1918년 말경에는 이미 300만이 넘는 우리나라 최대 종단으로 성장해 있었다. 

 

의암성사는 국제정세를 살피러 떠났던 일본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1906년 1월에 귀국한 이후로 항상 일본의 신문과 잡지를 구독하면서 국제정세를 면밀하게 살피고 있었다. 국제정세를 살펴볼 때 1919년이 독립운동을 시작하기에 매우 적합한 때라고 판단한 의암성사는 1918년 12월 24일 인일기념식에 참석차 상경한 교단 간부들을 상춘원(常春園)으로 불러서 말하기를 “지금 우리 면전에 전개될 시국은 참으로 중차대하다. 이 천재일우의 호기를 우리의 무위무능으로 간과한다면 천추의 한이 될 것이다. 내 이미 계획한 바 있으니 제군들은 내 지시에 따르라. 보국안민이 되고 못되는 것은 새해(1919) 1월 5일부터 시작하는 49일 특별기도에 달려있으니 정성껏 시행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최측근 제자인 권동진, 오세창, 최린 세 사람을 불러서 우리민족 전체가 참여하는 평화적인 독립만세운동을 천도교가 중심이 되어서 추진하라고 지시했다. 

 

의암성사의 명을 받은 세 사람은 기밀유지를 위해서 최린이 실무대표로 외부 인사들과 접촉한 후에 그 결과를 가지고 함께 논의하기로 했다. 최린은 중앙학교 기숙사로 찾아가서 평소에 친분이 깊었던 최남선, 송진우, 현상윤과 만나서 천도교 측의 독립운동계획을 설명하고 함께 하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민족대표로 적합한 저명인사들을 물색한 후에 이들과 접촉해 보았다. 그러나 모두가 거절하는 바람에 난감한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그래서 나온 대안이 종교계 인사들과 접촉해서 독립운동을 함께 하는 것이 좋겠다고 의견일치를 보았다. 이 때 거론된 사람이 기독교 장로이면서 정주에서 오산학교를 경영하고 있던 이승훈이었다. 김도태를 통해 전달을 받은 이승훈은 2월 11일 상경했으나 일제의 감시 때문에 최남선은 만나지 못하고 대신 송진우와 현상윤을 만나 셋이서 계동 김성수를 찾아갔다. 그 자리에서 천도교 측의 독립운동계획과 그동안의 경과를 자세히 설명하고 천도교 측 운동에 기독교 측의 참가의향을 물었더니 이승훈은 이에 적극 찬동하고 동지를 규합할 것을 약속하였다.

 

기고자/천도교 교화관장 김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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