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년만에 공개된 안중근보면서 느낀전율

안중근의사 기록공개요구도,사할린 민간인 학살진상조사도 하지않는정부!

박선영 칼럼 | 기사입력 2011/11/18 [09:06]

102년만에 공개된 안중근보면서 느낀전율

안중근의사 기록공개요구도,사할린 민간인 학살진상조사도 하지않는정부!

박선영 칼럼 | 입력 : 2011/11/18 [09:06]
박선영 자유선진당 의원
횡재인가? 행운인가?

러시아 쌍트 페테르부르그에서 안중근 의사의 사진과 문건을 보는 순간 내 눈의 조리개는 한껏 부풀었다. 두 손은 뒤로 묶이고, 윗도리 세 번째 단추는 떨어져 나가고, 온통 먼지투성이인 바지. 그것도 오른쪽 무릎부분은 구멍이 뻥 뚫릴 정도로 찢어져 있으나, 안 의사의 표정은 평화로웠다. 눈을 아래로 깔고 있어서일까? 빛나는 그의 두 눈도 사진 속에서는 평화로워 보였다.

1909년 10월 26일, 할빈역에서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처단한 직후 러시아 경찰에 붙잡힌 직후 찍은 것으로 보이는 안중근 의사의 모습이다. 온몸사진이
공개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 사진을 나는 지난 11월 초 러시아 역사기록보존소에서 보았다. 그동안 이런 자료가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고 여러 차례 다양한 경로를 통해 자료공개를 요청했으나 계속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던 러시아가 두 나라 대통령이 참석하는 ‘한·러대화’ 기간에 맞춰 딱 두 쪽만 공개한 것이다.
전체는 196족, 무려 200족 가까운 분량인데 딱 두 쪽만 유리상자 속에 넣어서 공개했다.

체면을 불구하고 역사기록보존소장에게 매달렸다. 나머지 페이지들도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몸집이 작은 동양여자의 간절한 애원이 안쓰러워서였을까? 답변은 의외로 쉽게 나왔다. “다른 사람들 다 간 뒤에 당신에게만 공개할 테니 기다리라”고.

횡재일까? 행운일까? 아님 내 기도가 이루어진 것일까?

우여곡절을 거치기는 했지만 어쨌든 나는 그 문건을 손에 넣었다. ‘국경수비대 밀레르 검사가 이루크츠크 법원의 회니만데르 검사에게 보내는 이등박문  저격사건 보고서’와 ‘국경지대 8구역 스트라조피 치안판사의 이등박문 저격사건에 대한 수사기록’ 등 9건의 문서였다.

대학합격통지서를 받았을 때 이토록 기뻤을까? 비교할 수 없었다.
가슴 속에서 뜨거운 불덩이가 솟아오르고 터질 듯이 콩닥거리던 그 순간을 어찌 내 이 짧은 문장력으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러시아어를 전공한 교수를 졸라 한 장 한 장 읽어 나갔다. 100년 전, 사회주의혁명
이전의 옛글(古語)로 된 문건이라 진도는 나가지 않았지만, 더듬더듬 해독하다시피 읽어나가는 순간순간이 내게는 끝없는 놀라움과 분노를 오르내리게 하는 롤러코스터 그 자체였다.

나는 조국을 위해 복수했다”고 당당하게 말했다는 안중근 의사. 그 첫 마디에 전율했다. 우격다짐으로 결박당한 상황에서도 안 의사는 꼿꼿했다고 문건은 증언하고 있었다. 심지어 ‘조국을 위해 복수했다’는 어투가 아주 오만하기까지 했단다.
 
당황하거나 목숨을 구걸하는 비굴함을 보이기는커녕 오만할 정도로 당당했다는 그를 러시아 경찰과 검사, 판사들은 하나같이 ‘살인자’라고 적고 있었다.
러일전쟁에서 굴욕적으로 지고 난 직후임에도 러시아는 철저히 일본편이었던 셈이다. 강대국은 강대국 편인가? 러시아는 안 의사를 ‘흉한’이라고도 표현했다. 일본인 말고 러시아인에게는 단 한 발의 총도 쏘지 않은 안 의사에게 흉한이라니!

잠시 후 이등박문이 뒈졌다는 소식을 들은 안중근 의사는 ‘이제 내 사명을 다 했다’며 취조실 벽에 걸려 있던 성모상을 향해 무릎을 꿇고 기도를 했단다.
그는 ‘도마’라는 세례명을 가진 가톨릭신자였다. 그런 그의 모습에 밀레르 검사는
 ‘그는 기쁨에 차올라 하느님에게 감사기도를 드렸다’고 적고 있었다. ‘기쁨’, ‘감사기도’라는 낱말을 들으며 나도 모르게 자세를 곧추세웠다. 거룩함 바로 그것이었다.

스트라조프 판사가 재심문을 할 때에는 일본 총영사관의 스기노(杉野)도 입회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공범을 묻는 판사에게 안 의사는 딱 잡아뗐다. ‘ 나 혼자 한 일이다.’이런 안중근 의사에 대해 러시아의 당시 재무장관이던 코크프초프는 ‘그는 아주 멋있었다. 젊고 멋있고 균형 잡힌 모습에 의젓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러시아는 자국 영토 안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재판권도 행사하지 않고 단 14시간 만에 일본에 안 의사의 신변을 인도했다.

전광석화처럼 눈 깜짝할 사이에 넘겨버린 것이다. 그것도 초동수사서 원본과 같이. 자신들은 사본을 갖고 원본을 아예 일본에 넘겨준 러시아. 이해가 되지 않는 처사였지만 일본은 그 원본을 아직도 공개하지 않고 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안중근의 몸을 인수한 일본에서는 “안중근이 우리의 영웅 이등박문을 처단했으니
‘우리도 사흘 동안 조선인들을 죽일 수 있게 해 달라’”는 청원이 빗발쳤다고 한다.
소름이 쫙 돋으며 미즈호 사건이 떠올랐다.

1945년 일제의 압제에서 해방되던 날.

사할린에 있던 우리 동포들은 그 소식을 사흘 후에야 들었다. 라디오도 귀하던 시절, 정보가 느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할린의 일본인들은 비상전문을 통해 그 사실을 즉시 알았다. 그리고는 바로 경찰과 군인, 민간인들이 합심해 사흘 동안 조선인들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했다. 임신부와 아이, 노인까지 닥치는 대로 죽였다. 전형적인 민간인 학살이었다. ‘광복을 알면 조선인들이 우리를 죽일지 모르니 우리가 먼저 조선인들을 죽여 버려야 한다’며 사흘 동안 광란의 살인행각을 벌인 것이다.

이른바 미즈호 사건이다. 그러나 이 순하디 순한(?) 대한민국 정부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그 민간인 학살 사건에 대해 진상을 파악할 생각도, 그 희생자들을 위로할 생각도 하지 않고 있다.
 
사흘 동안 조선인을 죽이게 해 달라’ 졸랐다는 그 문건을 보면서 나는 치를 떨었다. 안중근 의사의 묘를 찾기 전까지, 그리고 미즈호 사건을 이 세상에 제대로 알리기 전까지는 ‘사흘간의 집단 민간인 살해사건’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미제의 사건일 뿐이다.
  • 도배방지 이미지

사할린민간인 학살진상,안중근의사 관련기사목록
광고
광고
광고
추천칼럼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