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김정일 평양포옹 "내막 최초공개"

<특급비화> 박지원, 6·15 8주년 앞두고 남북정상회담 막후 첫 육성증언

뉴민주닷컴 | 기사입력 2008/06/11 [11:01]

김대중·김정일 평양포옹 "내막 최초공개"

<특급비화> 박지원, 6·15 8주년 앞두고 남북정상회담 막후 첫 육성증언

뉴민주닷컴 | 입력 : 2008/06/11 [11:01]
김대중 대통령 시절 청와대비서실장을 지낸 박지원 의원은 6월11일 ‘서울대 6·15 연석회의’ 로부터 초청을 받아 서울대 근대법학100주년기념관에서 “6·15정상회담은 어떻게 이루어졌나?“를 주제로 한 특별강연을 한다. 그는 이 강연에서 그동안 비화로 남아 있는 남북정상회담의 주요 내용을 공개, 주목을 받았다.
그는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 평양의 순안비행장에 도착한 이후 ”두 분이 함께 걸어가자 함성은 하늘을 찔렀다. 대통령도 나도 환영인파에게 걸어가서 악수를 하려고 했지만 제지를 당했다.
두 분은 조선인민군의 분열을 받았다. 조선인민군 명예의장대 대장이 '조선인민군 육해공군 명예의장대는 경애하는 최고사령관 동지와 김대중 대통령을 영접하기 위해 정렬 했다'라며 우리 대통령에게 경례하고 신고를 했다. 처음 겪는 참으로 희한한 일이었다. 인민군이 우리 대통령에게 분열과 신고를 하다니. 아! 이제야 한반도의 평화가 시작된다는 생각에 나는 온몸을 감싸는 짜릿한 감격의 전율을 느꼈다“고 전하고 ”또다시 예상치 못한 희한한 일이 생겼다. 김 위원장이 대통령 차에 동승을 했다.
백화원초대소에 도착할 때까지 정말 많은 인파와 함성이 계속됐다“고 공개했다. 김 대통령이 북한 인민군의 분열을 받을지를 사전에 몰랐다는 것이다. 이 비화는 한국 현대정치사에서 주요한 남북정상회담 개최의 내막이 담겼다는 점에서 전문을 지상중계 한다. <이 글에서 1인칭 ”나“는 박지원이다>
▲     © 뉴민주닷컴

 
회담 주역 박지원의 생생한 육성증언

먼저 역사적인 6·15 남북정상회담과 6·15공동선언 8주년을 맞아 나를 초청해 주신 <서울대 6·15 연석회의> 관계자 여러분과, 이 자리에 함께 해 주신 학생 여러분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김대중평화센터의 내 사무실에는 여러분들이 2003년에 이곳 서울대 캠퍼스에 건립한 ‘6·15 기념탑’ 사진이 걸려있다. 6.15남북정상회담 주역의 한사람으로서 참으로 마음 든든한 사진이 아닐 수 없다.
 
6·15남북공동선언은 분단 반세기만에 처음으로 남북정상이 회담을 갖고 직접 서명한 최초의 공동선언문으로, 지구상 유일한 분단국가인 우리가 과거 1,300년간 하나였듯이 다시 하나된 나라를 만들겠다는 통일의 의지를 전 세계에 알린 역사적 선언이다. 또한 이에 앞서 남북 특사 간에 정상회담 개최를 합의하고 서명한 4·8합의서는 7·4 남·북공동성명에 기초해서 남북정상회담을 갖는다는 역사 계승의 중요한 의미를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는 이런 합의가 이행되기는커녕  합의 자체를 부정하는 듯한 기류가 있어 매우 우려가 된다.
 
경제는 무너지면 다시 세울 수 있다. 그러나 남북관계가 무너지면 다시 세울 수 없다. IMF 외환위기로 파탄이 난 우리 경제는 김대중 대통령에 의해서 다시 세워졌다. 남북관계는, 휴전선에서 ‘탕’하는 한 발의 총성만 있어도 쌀과 라면을 사재기하던 긴장관계에서, 핵실험을 해도 정부는 6자회담의 성공을 위해 노력하고 민생은 동요가 없는 성숙한 수준으로 발전되었다. 6·15공동선언이 분단 후 처음으로 남북관계를 바로 세웠다. 만약 다시 넘어진다면 어떻게 세우겠습니까? 다시 긴장과 대결의 시대로 돌아간다면 민족의 미래는 물론 안전도 장담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내가 대통령 특사로서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합의한 48합의서의 체결과정과 6·15 남북정상회담 당시의 상세한 과정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자 한다. 오늘 최초로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킨 대한민국 ‘유일 당사자’로부터 생생한 육성 증언을 듣게 되는 것이다. 내가 문화관광부 장관 재임 때인 2000년 초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을 우연히 만났다. 정 회장은 나에게 남북정상회담이 가능하고 현대가 협력할 수 있다고 했다. 나도 관심을 표명했다.
 
김대중 대통령(재임 당시 직책으로 이하호칭 같음)과 식사를 하면서 여러 말씀을 나누다가 정 회장과의 대화를 보고 드렸더니, 대통령도 관심을 표명했다. 나는 정 회장에게 전화해서 가능성을 검토해 달라고 했다. 그런데 며칠 후 임동원 국정원장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을 받고 만났다.
임 원장은 “우리 사이에 그러한 중대한 사안이 있으면 국정원장인 나에게 말해야지 어떻게 대통령에 직보할 수 있는가”라며 불만스러운 말을 했다. 그 후 임 원장은 “현대의 이익치 회장을 만났고, 이회장과 ‘현대의 대북 에이전트(Agent)인 요시다 다케시라는 사람을 통해 정상회담 추진이 가능하다’는 대화를 나누었다”고 밝히면서 나에게도 협력해서 추진하자고 했다.
2000년 2월초 국정원에서 요시다 다케시가 입국하니 나에게 만나보라는 연락이 왔다. 물론 그 사이 정 회장과 몇 차례 정상회담 관계로 만났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요시다를 만나기로 했다.
 
요시다가 정상회담 막후 중계
 
요시다를 만나는 장소에는 정이 ·회장과 통역이 동석했다. 현대측 인사들은 소개를 하고 난 후에 나와 요시다, 통역만 남겨놓고 옆방으로 갔다. 요시다의 부친은 재일교포 사업가이자 북송 재일동포로 김일성 주석의 측근으로 북한에서 살다가 작고했고, 그런 인연으로 자신이 북한의 대일대남 관계 사업을 하고 현대의 대북 에이전트(Agent)라고 설명하면서 정상회담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나는 온 몸에 짜릿한 흥분과 함께 민족에 대한 열정이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나는 남북정상회담이 가능하다고 판단했고, 이 사실을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그 후 일본 아사히신문 북한통 간부기자가 나를 방문해서 모 일본 정치인과 함께 추진하겠다며 정상회담 추진사실을 아는 척 했다. 제가 요시다에게 확인하자 요시다는 “염려 말라”는 말을 했지만, 나는 “우리 민족의 중대사를 함부로 일본 관계자에게 말할 수 있느냐”고 주의를 주었다.
 
한참 후 평양에서 “과거 안기부 모략꾼들이 끼어들어 대화가 공전되었다. 남북대화가 참다운 대화가 되려면 국정원이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논평이 나왔다는 보도가 있었다. 국정원에 확인한 결과 사실이었다. 2000년 3월초 대통령에게서 임 원장과 나녁 식사를 함께 하자고 했다. 대통령은 나에게 “특사로 싱가포르에 가서 북한 특사와 회담을 하라”고 했다. 나는 대북관계 전문가도 아니고 담당부서인 통일부장관이 하는 게 옳다고 말 했지만, 대통령은 “통일부장관은 노출의 가능성이 있고 북한에서 나의 측근을 원하니 박 장관이 다녀오라”고 했다.
 
나는 민족에 대한 열정과 그동안 정치협상을 해 왔던 경험을 살려 꼭 정상회담을 성사시키겠다는 각오로 대통령의 명령을 받았다. 국정원 간부 두 사람이 나를 돕기로 했다. 나는 송호경 북한 특사가 외교관 출신으로 대남전문가이고 부총리급이라는 지극히 기본적인 지식과 북측 수행원 세 사람 명단, 그리고 국정원 간부의 보고서 2건 10여 페이지를 읽고 수행비서만 대동한 채 2000년 3월 9일 극비로 싱가포르 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싱가포르 공항에 도착하니 국정원 두 간부가 나왔고 우리 일행 넷은 택시를 타고 호텔로 향했다. 호텔에서는 한국 사람을 피하기 위해 룸서비스로 식사를 해결하고 북측 인사들의 소식을 기다렸다. 그러다가 북측에서 정몽헌 회장을 통해 우리가 투숙한 호텔의 비즈니스 룸(Business room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약속장소에 가니 정몽헌, 이익치 회장과 요시다 등이 있었고 이들의 소개로 북측 특사와 처음으로 인사를 했다.
 

현대측 인사들은 떠나고 회담이 시작됐다. 북측은 송호경, 권민 등 네 사람이었다.  참고로 북한의 대남 일꾼들은 대게 이름을 두 개 사용했다. 권민은 권호웅으로 현재 남북장관급회담 북측 대표단장이다. 우리 측은 나와 국정원 두 간부였다. 송호경 특사는 온화한 인상에 차분한 말씨였고 퍽 친근감이 갔다. 나와 송 특사가 사실상 단독회담 방식으로 진행했다. 물론 나는 배석한 국정원 두 사람에게 실무적 조언을 받았다. 이 자리에서 나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송 특사의 발언이 국정원 두 간부가 사전에 나에게 보고한 내용과 거의 일치했던 것이다.
 
첫회담 상호간의 입장만 확인
 
첫 번째 회담에서는 상호간의 입장만 확인했다. 그런데 회담 후 국정원 두 간부가 “장관님은 어느 전문가보다도 능수능란하게 회담을 하셔서 분위기를 완전히 주도했다”라고 칭찬의 말을 했다. 그래서 나는 농담조로 “당신들 간첩 아니냐, 어떻게 그렇게 당신들이 준 자료와 북측의 발언이 일치하느냐”고 했다.
 
나는 여기서 잠깐 국정원 대북담당자들에 대한 예찬론을 말할까 한다. 제가 특사 예비회담, 정상회담 준비, 6·15남북정상회담, 8·15 언론사 사장단 방문, 또 다른 방문 등 북한 관련 업무경험을 통해서 느낀 것은 ‘대북문제에 대해서만큼은 국정원 관계자들을 신임하고 맡기면 안심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과거 시대의 국정원 사람이 아니었다. 전문적 지식을 갖추고 남북의 화해와 협력을 위해 온갖 지혜와 열정을 바치는 분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6·15남북정상회담 이후에 몇 차례의 언론 인터뷰를 통해서 국정원 대북관계자들은 국보급 존재라고 말했다. 실제로도 대통령에게 ‘국정원의 대북문제 담당을 국장에서 차장급으로 승격시켜야 한다’는 건의를 임원장과 함께 드려, 오늘의 국정원 3차장제가 확립되었다.
 
제가 싱가포르에서 회담을 하고 있을 때 독일을 방문 중이신 김대중 대통령은 통일 독일의 현장에서 역사적인 베를린 선언을 발표했다. 김 대통령은 베를린 선언을 통해 ①남북경협을 통한 북한 경제회복 지원 ②한반도 냉전종식 및 남북 간 평화정착을 위해 북한의 대외관계 지원 ③이산가족 문제해결 ④특사교환 등 당국 간 대화라는 4개항을 천명 했다. 대통령 취임사에 이어 또다시 남북정상회담을 제안한 것이다.
 
나는 송 특사에게 베를린 선언을 설명하고 정상회담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송특사는 “김대중 대통령의 목소리를 듣는 것 같다. 싱가포르 접촉은 상부에 상세히 보고하겠으니 1차 회담이라 하지 말자”고 말했다. 나는 이처럼 허심탄회한 송 특사의 발언에 그의 마음이 열리고 있다고 직감했다.
나는 귀국하여 대통령에게 정상회담이 틀림없이 성공하리라는 확신과 함께 회담 내용을 자세히 보고했다. 국정원 두 간부는 국정원장에게 보고했다. 북측에서 다시 상하이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고 3월 17일 상하이에서 만났다. 송 특사의 제안으로 상하이회담을 ‘1차 예비회담’이라고 결정했다. 제가 2002년 9월 정기국회에서 싱가포르 회담을 숨긴 것은 북한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1차 회담에서 북측은 경제적 지원을 요청했다. 우리 정부가 현금지원을 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단호히 거절했다. 정상회담 후 교류협력을 통해 상업차관과 인도적 차원의 지원은 가능하지만 우리의 예산절차상 불가능하다고 단호히 거절했다. 나는 정 회장을 제 방으로 불러 북측의 무리한 요구에 대해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나중에 <내일신문>에 보도된 사실이지만, 이때 정주영 회장은 유창순 전 상의회장을 만나 ‘개성공단을 현대에서 개발할 것이며 몇 천만 평을 평당 10만원~30만원만 받아도 현대는 엄청난 이익이 난다’는 사실과 ‘북측에서 그 대가로 15억불을 요구해서 정몽헌 회장이 박지원 장관과 상해에서 깎고 있다’는 말씀을 했다고 보도 되었다. 특검 수사과정에서 밝혀졌지만 정몽헌 회장이 부친 정주영 회장에게 북측에서 10~15억 달러를 요구했지만 자기가 5억 달러로 깎았다고 자랑을 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상하이회담은 ‘정부지원은 없다’는 나의 강경한 태도로 사실상 결렬되었다. 베이징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와서 3월 22일에 다시 만났지만, 또 결렬되었다. 사실상 포기상태였다.
 

베이징서 4월8일 만나자 연락와
 
베이징에서 4월 8일에 다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내가 4·8합의 후에 안 사실이지만 현대 정회장과 국정원 관계자가 그 사이  베이징에서 접촉을 가졌었다고 한다. 여기서 밝히지만 싱가포르 회담에서 송 특사는 김정일 위원장을 ‘위대한 장군님’이라고 하였으며 나에게도 그렇게 불러 달라는 은근한 요구를 했다. 나는 순간적으로 ‘위대한 장군님’은 우리 국군을 생각하면 그렇게 불러서는 안 되고, ‘노동당 총서기’라고 하면 노동당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국방위원장’이면 공식 명칭이고 만약 회담이 결렬되면 국민들에게 우리나라 국방장관 정도로 설명하려고 ‘국방위원장’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사실 나는 그 전에 우리 정부에서 김정일 위원장을 어떻게 호칭했는지 모르지만 오늘날 국방위원장이라고 굳힌 것은 제가 아닌가 생각한다.
 
나는 합의 과정에서 대통령에게 전화로 보고를 드렸고 임 원장과도 통화를 했다. 대통령은 제가 판단해서 결정하라고 했다. 베이징 3차 회담에서는 4·8합의문을 놓고 상봉과 회담의 구분, 일정, 칭호를 갖고 싸웠다. 나는 상봉은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이 하고, 회담은 북한의 헌법상 국가원수인 김영남 상임위원장과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일정이 없으면 의전상 진행이 되겠는가? 외교관례대로 합의문 초안은 사전에 작성해야 되지 않겠느냐 하고 따졌다. 하지만, 송 특사는 상봉과 회담은 문자 그대로 해석하고, 위대한 장군님의 일정은 자기도 사전에 알 수 없고, 합의문은 회담을 한 결과로 만드는 것이지 어떻게 사전에 만드느냐고 주장했다. 정말로 막무가내였다.
 
결국 나는 ‘이것이 민족의 운명이라면 내가 모든 책임을 지고 죽을 수 있다’는 각오로 합의문에 서명을 했다. 나는 귀국해서 어쩌면 무모하다고 할 수 있는 이 합의서를 보고했지만 그 누구도 다른 말씀을 하지는 않았다. 또한 송 특사는 합의 결과를 발표하는 시기에 대해서도 “이미 중국 공안에서 알고 우리 호텔에 출입이 시작되었고, 4월 10일 평양에서 외국인 인사 등이 참석하는 대형집회가 있으니 그때 발표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김일성 주석의 생일 사전행사였다. 나는 처음엔 우리나라 4·13총선을 의식해서 연기를 주장했지만 이것도 제가 수용하고 결정했다. 결과적으로 나는 정상회담의 성사를 위해 상봉과 회담, 일정, 합의문, 발표 시기 등은 양보했지만 정부의 현금지원은 결단코 거부했다.
 
우리는 각자 본국에 보고를 하고 베이징의 일본식당에서 폭탄주를 마시면서 서로를 격려했다. 나는 이날 밤 송 특사로부터 타이타닉주 제조법을 전수 받았으며 지금도 때때로 즐긴다. 이렇게 해서 역사적인 6·15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킨 4·8합의서가 탄생했다. 48합의서를 읽어보겠다.
 
<남북합의서>
남과 북은 역사적인 74남북공동성명에서 천명된 조국통일 3대원칙을 재확인하면서 민족의 화해와 단합, 교류와 협력, 평화와 통일을 앞당기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합의하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청에 따라 김대중 대통령이 2000년 6월 12일부터 14일까지 평양을 방문한다.
평양 방문에서는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이에 역사적인 상봉이 있게 되며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된다.
쌍방은 가까운 4월중에 절차문제 협의를 위한 준비접촉을 갖기로 하였다. 
 
2000년 4월 8일.
 
상부의 뜻을 받들어 남측 문화관광부 장관 박지원.
상부의 뜻을 받들어 북측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부위원장 송호경
 
나는 4월 9일 귀국해서 대통령에게 보고를 했고, 4월 10일 박재규 통일부장관과 공동기자회견을 갖고 남북정상회담 개최 합의를 발표했다. 국내는 물론 전 세계에 톱뉴스로 보도되며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4월 10일 합의내용을 발표한 후에 6월 13일 평양으로 출발하는 날까지 총선용이었다는 정치적 공격과 함께 나는 많은 시달림을 당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모든 것을 꼼꼼하고 정확하게 준비하시는 분이다. 전문가들을 불러 밤늦게까지 집단 혹은 개별적으로 정상회담에 대한 조언을 들으셨다. 전문가들은 상봉과 회담, 일정, 합의문 등을 거론하며 합의 당사자인 나 박지원의 무모함을 지적하였다. 가장 문제가 된 것은 김일성 주석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금수산기념궁전 참배였다. 사실 회담 과정에서 송호경 특사는 이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다. 나도 물으려다가 먼나 묻는 건 손해라고 생각해서 거론하지 않았다.
 
"민족위해 나를 버려야 한다"
 
대통령은 거의 매일 밤 10시경 나를 청와대 내 대통령 거처인 관저로 들어오라는 지시를 했다. 나는 늦은 시간이었지만 관나로 가서 대통령의 추궁성 질문에 충분히 답변해야 했다.
“절대 성공합니다. 염려 마십시오” 했지만, 이때마다 나는 민족을 위해 나를 버려야 한다는 각오였다. 그러나 대통령은 참배문제를 분명히 합의하지 않았다고 불호령을 내리셨고, 나는 “전세아파트를 계약할 때도 불리한 사항은 따로 요구하지 않으면 말하지 않고 계약 한다”라고 안심시켜 드렸다. 대통령은 나를 믿어 주셨고 그러면서 당신의 각오를 새롭게 했다. 어느 날은 언론인들과 술을 많이 마셔서 도저히 관나에 갈 수 없었다. 기자들과 너무 과음을 해서 못 들어간다고 말씀드렸지만 밤 11시인데도 들어오라고 야단을 치셔서 말 그대로 크게 혼날 각오를 하고 들어갔다. 자정까지 한 시간 동안을 묻고 답변하는 일을 계속 했다. 같은 말씀의 반복이었지만 대통령의 심정이 오죽 하셨겠습니까? 자정이 되자 일어서시면서 “자네 술 좀 마시지 마” 했다. 순간 나는 치기가 발동했다. “대통령님, 제가 술을 마셔야 국태민안 합니다” 대통령은 나를 돌아보시지도 않고 안방으로 향했다.
 
제가 술을 마셨다는 게 잘한 일은 아닐 겁니다. 하지만 그만큼 몸을 아끼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는 자부심은 지금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나는 술을 즐겨 하지 않는다. 필요에 의해 마셔야 할 때는 몸을 생각하지 않았고 그때의 후유증으로 병원신세를 많이 졌다. 지금 ‘소통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는 이명박 정부의 내각과 청와대에도 국민과의 소통을 위해서 몸을 아끼지 않고 헌신하는 분들이 더 많아져야 한다는 생각이다.
 
정상회담을 위한 방북 전에 마침내 문제가 터졌다. 북측에서는 금수산기념궁전 참배를 요구했고, 임동원 원장이 특사로 평양을 다녀오는 등 노력을 했지만 해결되지 않았다. 드디어 평양에서는 KBS 등 사전 준비 팀을 추방하느니 야단이 났다. 평양 방문 일자도 하루가 연기되었다. 특검에서도 밝혀졌지만 일자가 연기된 것은 송금 지연 때문이 아니었다. 우리 언론이 항공사진을 이용해 순안공항에서 평양까지의 이동경로를 예측 보도한 것 등의 보안문제와 순안공항의 수리미비가 이유였다. 평양에서는 “금수산기념궁전에 참배하지 않으면 정상회담을 할 수 없고, 올 필요도 없다”고 통보해 왔다. 나는 두려웠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은 위기가 오면 더욱 강해지십니다. 나에게 꾸중 한마디 않으시고 6월 13일 우리의 평양 착륙을 거부하겠다는 북측의 통보에도 불구하고 ‘출발하자’고 결정했다.
 
금수산기념궁전 참배문제 
 
서울공항에서 환송식이 열리고 공식수행원들은 전용기 앞에서 대통령을 기다렸다. 그런데 임 원장이 황급히 서울공항 청사로 들어갔다. 대통령이 도착했다. 임 원장의 미소가 보였다. 대통령에게 뭐라고 귓속보고를 했다. 다른 분들은 이 사실을 몰랐다. 임 원장이 나에게 ‘금수산기념궁전 참배문제는 평양에 와서 논의하자는 북측의 통보를 받았다’고 알려줬다. 우선은 안심하고 비행기에 올랐다. 모두들 흥분했지만 나는 제 정신이 아니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걱정이 태산이었다. 나는 북한 상공에 있었지만 북한의 어떤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평양에 있는 동안 4번을 울었다. 첫 번째는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이 평양 순안공항에서 처음으로 만나 포옹을 했을 때이다. 김대중 대통령과 수행원들을 태운 전용기가 드디어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했다.
그런데 서울 출발 전에 남북정상회담 예비 협상테이블에 나를 수행했던 국정원 두 간부에게 “북측에서 왜 도착성명을 발표하지 못하게 하느냐”고 물었더니 ‘문서로만 배포하라는데 어쩌면 김정일 위원장의 공항영접이 있지 않는가라고 분석된다’고 보고했다. 수행원들은 비행기 뒤쪽 문으로 먼저 내렸다. 뒷문으로 내리면서 선발대로 가 있는 외교부 의전장이 비행기로 올라 오길래 ‘김 위원장이 나오느냐’고 물었더니 전혀 모른다고 답했다.
비행기에서 내려서 보니 북한의 환영인파와 의장대가 도열하고 있었다. 북한의 간부들이 기내영접을 위해 비행기에 올랐다. 그런데 갑자기 함성이 터졌다. 바라보니 김정일 위원장이 특유의 인민복 복장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비행기 문이 열리고 드디어 대통령 내외분이 보였다. 대통령은 평양의 하늘과 북녘 산천의 모습을 한참 보았다. 나는 보지 못했다만 눈에는 감격의 눈물이 가득 고였으리라 짐작된다. 대통령이 전용기 트랩을 내려오고 나서 두 분이 악수를 하고 포옹을 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드디어 두 분이 함께 걸어가자 함성은 하늘을 찔렀다. 대통령도 나도 환영인파에게 걸어가서 악수를 하려고 했지만 제지를 당했다. 두 분은 조선인민군의 분열을 받았다. 조선인민군 명예의장대 대장이 “조선인민군 육해공군 명예의장대는 경애하는 최고사령관 동지와 김대중 대통령을 영접하기 위해 정렬 했다”라며 우리 대통령에게 경례하고 신고를 했다. 처음 겪는 참으로 희한한 일이었다. 인민군이 우리 대통령에게 분열과 신고를 하다니. 아! 이제야 한반도의 평화가 시작된다는 생각에 나는 온몸을 감싸는 짜릿한 감격의 전율을 느꼈다.
그런데 또다시 예상치 못한 희한한 일이 생겼다. 김 위원장이 대통령 차에 동승을 했다. 백화원초대소에 도착할 때까지 정말 많은 인파와 함성이 계속됐다. 그 함성 소리 때문에 나도 옆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다. 그런데 두 분이 차 속에서 무슨무슨 이야기를 했다는 추측성 말들이 많다.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는 지금도 실소를 금할 수 없다.
 
두 번째 눈물을 흘린 눈물
 
두 번째 눈물을 흘린 것은 상봉과 회담을 모두 김정일 위원장과 하기로 결정되었을 때이다. 백화원초대소에 도착했다. 두 분은 다시 한번 악수를 하셨고 거침없는 김 위원장의 발언이 쏟아졌다. 그 때 본 김정일 위원장은 제가 평생을 알고 있던 김정일이 아니었다. 뿔도 없고 바보도, 탕아도 아니었다. 김 위원장은 “이번에 수고하신 박지원 장관 선생이 어디 계시느냐”며 나에게 각별한 호의를 베푸셨다. 한편, 나는 이것이 상봉이고 정상회담은 김영남 상임위원장과 하려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김 위원장은 계속 말했다. “대통령님, 겁도 없이 여기를 오셨습니다. 우리 간부들이 공항에 나가지 말라고 했지만 연로하신 대통령이 오기에 제가 나갔습니다. 오늘은 쉬시고 내일 제가 이리로 오겠습니다. 수령님도 여기서 회담을 했습니다. 만약 우리 간부들이 반대한다면 새총으로 빨간 불을 쏘아버리고 제가 이리로 와서 회담을 하겠습니다” 이때 나는 두 번째 눈물이 났다. 상봉도 회담도 모두 해결된 것이었다.
 
세 번째 눈물을 흘린 것은 가장 큰 걱정거리였던 금수산기념궁전 참배문제가 해결되었을 때이다. 송호경 특사로부터 평양에 도착한 그날 즉, 6월 13일 밤 10시에 인민회의장에서 만나자는 전갈이 왔다. 나는 대통령의 방으로 가서 보고를 했다. 임동원 원장은 임춘길 통일전선부 부부장과 만난다고 했다.
임춘길 부부장은 후에 임동옥이라는 이름으로 더욱 알려졌다. 대통령은 “참배문제는 꼭 해결하라” “박장관은 할 수 있다”라며 지시 겸 격려를 했다. 북측에서 제공한 차로 약속장소로 갔다. 송 특사는 북한을 방문하는 모든 인사는 금수산기념궁전에 참배했다는 관례와 함께 “이를 거부하면 회담은 없다”고 했다. 나는 우리 국민정서도 있고 사전 요구가 없었다며 거절했다. 송 특사는 남측 국민정서만 있고 북측 인민정서는 없느냐고 따졌다. “좋다. 그러면 내가 참배하고 내일 대통령에게 장관 사표를 제출하고 베이징을 경유 귀국해서 구속당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송특사는 막무가내 였다. “그러면 마지막 제안이다. 대통령 해외순방시 비서실장은 수행을 하지 않는데 이번 평양 방문에는 이례적으로 한광옥 비서실장이 수행했다. 비서실장은 대통령을 대신하고 한실장과 나는 대통령의 최측근이다. 둘이서 참배하고 돌아가서 구속당하겠다”고 했다. 역시 요지부동이었다.
나는 계속 설득했다. “두 분 정상의 역사적 상봉은 이루어졌다. 이제 회담을 앞두고 이 문제로 깨진다면 우리 민족의 불행이고 국제적 망신”이라고 했다. 자정이 되자 송 특사는 “장관선생의 열정을 상부에 보고 하겠다”고 했다. 백화원초대소로 돌아오니 대통령은 임 원장과 담소하시면서 나를 기다렸다. 나는 희망적인 보고를 했으며 대통령은 기다려보시자며 마지막까지 노력하라고 했다. 임 원장에게 임춘길 부부장과의 면담 내용을 물으니 참배문제는 나와 송 특사가 논의한다는 이야기만 했다고 했다.
간첩을 잡아야 할 국정원장이‥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송 특사로부터 다음날 아침 즉, 6월 14일 오전 8시에 같은 장소에서 아침식사를 하자는 전갈이 왔다. 송 특사는 나에게 “상부에 보고한 박장관선생의 열정에 위대한 장군님이 참배는 안 하셔도 된다는 말씀이 계셨다”고 낭보를 주었다. 세 번째 눈물이 났지만 송 특사 앞에서는 그러하지 못했다. 속으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이렇게 해서 참배문제는 해결되었고 나는 대통령에게 낭보를 보고할 수 있었다. 6월 14일 아침이었다. 14일 밤 만찬석상에서 김정일 위원장이 직접 임동원 원장에게 이 말을 했고 이 장면이 TV에 잡혀서 ‘간첩을 잡아야 할 국정원장이 괴수 김정일과 귓속말을 하고 있다’라는 귓속말 사건으로 보도되기도 했다.
 
내가 마지막으로 눈물을 흘린 건 우리 민족의 통일의지를 담은 역사적인 6·15공동선언이 탄생했을 때이다. 북측에서 사전 일정은 공개하지 않았지만 모든 일정은 순조롭게 잘 진행되었다. 마침내 합의문 작성 작업이 시작되었다. 나를 수행했던 국정원 간부가 실무작업을 했고 임동원 원장과 김용순 비서 간에 협의가 이루어졌다. 임 원장이 만찬장에서 최종 작성된 합의문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이날 밤 만찬장에서 대통령이 서명했고 김 위원장도 수표 했다. 6월 14일 밤이었지만 북한에서는 꺾어진 날짜를 좋아한다는 사실대로 김 위원장이 날짜를 15일로 고쳤고, 이렇게 하여 역사적인 6.15공동선언은 탄생한다.
 
(나는 울보는 아닙니다만)네 번째 눈물이 났다. 6.15공동선언에 서명한 대통령이 김 위원장의 손을 잡고 나가셔서 이 사실을 발표하자 만찬장은 우레와 같은 우리 민족의 박수로 가득 찼다. 그러나 이때는 사진기자들이 없어서 역사적인 순간을 찍지 못했다. 당시 공보수석이었던 박준영 현 전남지사가 북측을 설득해 카메라 기자들이 입장하고 대통령에게 말씀드려 다시 연출함으로써 두 정상이 손잡고 찍은 역사적 사진이 탄생했다.
 
김 위원장은 만찬장에서 국방위원들을 불러 대통령에게 인사를 드리게 하고 술을 따르게 하였다. 김 위원장은 이희호 여사가 헤드 테이블(Head Table)에 계시지 않자 “김대통령이 흩어진 가족 문제를 제일 강조하시면서 평양에서 흩어진 가족이 되시면 되겠느냐”며 자리를 옮기시게 하는 배려도 하였다. 나는 모든 걸 성사시켰기에 너무 행복했다. 6·15남북정상회담이 성공적 회담이 된 후에 우리는 백화원초대소에서 갖고 간 우리 소주와 북한의 맥주로 통일의 의미를 담은 소폭주를 만들어 통음을 했다.
 
김 위원장과 둘이서 건배
 
나는 임 원장 방으로 갔다. 임 원장은 마침 특별수행원이었던 문정인 교수와 담소 중이었다. 나는 임 원장에게 엄숙하고 정중하게 “정말 수고했습니다”고 넙죽 절을 했다. 나의 이런 태도를 보고 문 교수는 의아해 했지만 지금쯤은 문 교수도 나의 열정을 이해했으리라 믿는다. 후일 문교수은 “김대중 대통령 인사 중 비밀특사로 박지원 장관을 선택한 것이 제일 잘한 인사였다”고 말했다는 전언에 혼자서 웃기도 했다.
김 위원장은 6월 15일 환송오찬을 마련했다. 헤드 테이블(Head Table)에 대통령 내외와 김정일 위원장, 우리 측 주요인사와 북측 인사 등이 앉았다. 헤드 테이블(Head Table) 나의 좌우에는 조명록 차수와 김용순 비서가 앉았다. 조명록, 김용순, 강석주, 장성택 등 북한 실세들이 오찬인데도 4~50도의 술을 계속 권하며 공격했지만 나는 사양치 않고 마셨다. 김정일 위원장은 “과거에는 독주를 마셨지만 의사의 권고로 와인만 마신다”고 했다. 제가 김 위원장 잔에 와인을 가득 채웠다. 김 위원장도 나에게 와인을 가득 채워 줘서 둘이서 건배를 했다.
 
마침 우리 측 특별수행원이었던 최학래 신문협회장, 박권상 방송협회장, 차범석, 강만길, 고은 선생 등과 구본무 LG회장, 손길승 SK회장, 윤종용 삼성부회장 등이 헤드 테이블(Head Table)로 와서 김 위원장과 건배를 하게 되어 모두가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가 이때 “모두 손을 잡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 노래를 합창하자”고 제안했고, 모두 함께 합창을 했다. 감격스러운 그 모습은 지금도 TV로, 사진으로 보도되고 있다. 이렇게 역사는 창조되고 있었다. 김 위원장은 나에게 많은 이야기를 했다. “왜 한국의 젊은 가수들은 이상한 노래만 부르냐”고 해서 나도 당시 제일 유명한 HOT등 요즘 가수 노래는 모른다고 했다. 제가 김 위원장에게 좋아하는 가수가 누구냐고 물었더니 “미자, 연자”라고 하였다. 우리가 의아스럽게 바라보자 ‘이미자, 김연자, 은방울 자매’라고 했다. 제가 다시 남자가수는 누구냐고 물으니 ‘조용필, 나훈아’라고 했다.
 
참고로 북한에서는 미국식으로 퍼스트 네임(Frist Name)을 많이 불렀다. 친근해진 정몽헌 회장에게는 몽헌 선생, 나에게는 장관선생이라고 불렀다. 김 위원장은 일을 많이 했다. 자정이 넘어서 헤어졌는데 다음날 아침에 만나서 “어젯밤 남쪽 TV를 보니 대통령님이 나랑 만나는 보도가 계속 나오고 있었다” 말했고, “아침 6시에 국방위원회를 소집했다”는 말도 했다. 송 특사와 제가 자정까지 회담했는데 아침 일찍 결정사항을 알려주는 등  김 위원장이 밤늦게까지 일한다는 것이 여러 곳에서 감지되었다. 만찬장에서 최태복 최고인민회의 의장에게 내가 물었다. 김 위원장은 낮에 잠깐씩 오수를 즐기신다고 했다.
후일 김 위원장에게 제가 직접 물었다. 김 위원장은 “위대한 수령님에게 새벽 4시~5시 사이에 하루 보고를 했다”며 자기는 밤 2시에 보고를 받는다고 했다. 우리는 얼리 버드(Early Bird), 북은 레이트 터버드(Late Bird) 라고나 할까요. 그런데 환송 오찬장에서 이헌재 재경부장관이 “김 위원장이 좋아하는 남측 가수들보다 박지원 장관이 노래를 더 잘 한다”고 말했고, 이 말을 들은 김 위원장이 나에게 노래를 청했다. 마침 우리 대통령도 한번 하라고 말씀했다.
 
 
‘내곁에 있어주’라는 노래불러
 
나는 노래반주도 없이 마이크를 잡았다. 나는 “가곡보다는 유행가가 좋겠다. 우리가 50년만에 만나서 이제 곧 헤어지니 아쉽다. 내 곁에 우리가 함께 있었으면 좋겠다는 의미에서 노래 하겠다”고 말하고 ‘내 곁에 있어주’라는 노래를 불렀다. 제 노래가 끝나자 김 위원장은 앙코르를 외치며 박수를 쳤고 모두들 앙코르를 원했다. 나는 다시 나갔다. “한국에서는 국회의원 한번하고 낙선했는데 평양에 와서 재창을 받았다. 김 위원장에게서 꼭 서울 답방을 하셔서 제가 재선하도록 해달라”고 했다. 그러자 김 위원장이 마이크를 달라고 하더니 “꼭 서울에 가서 장관선생 3선, 4선하도록 돕겠다”고 했다. 나는 “내 곁에 있어달라고 했지만 우리는 헤어 진다”면서 ‘우린 너무 쉽게 헤어 졌어요’를 불렀다. 김 위원장은 나에게 “장관선생은 인민예술가십니다”라고 했다.
 
2000년 8월 15일 제가 다시 평양을 방문했을 때 김 위원장과 북측 인사에게 “김 위원장이 나에게 그렇게 말했는데 왜 인민예술가 증명을 주지 않느냐”고 농담을 했더니, “우리 공화국에서는 위대한 장군님이 말씀하시면 그것이 증명이다”라며 “장관선생은 인민예술가이십니다”라고 했다. 김 위원장은 나와 대화하면서 “남쪽 출판물을 읽는데 왜 그렇게 외래어가 많냐. 이해를 못 하겠다”고 했다. 책을 북한에서는 출판물이라고 한다. 나는 “우리는 세계화 시대에 외래어도 국어처럼 많이 사용 한다”고 했다. 그런데 김 위원장도 내 노래에 ‘앙코르'라며 박수를 쳤다.
 
남북문제는 남쪽의 눈높이로만 바라보아도, 북측의 눈높이로만 바라보아도 해결되지 않다. 민족의 눈높이, 사랑의 눈높이로 바라보아야 한다. 김정일 위원장은 영특하고 위트가 있다. 국제정세를 소상히 알고 있다. 나의 이러한 판단에 대해 김대중 대통령도 같은 말을 했다. 김 위원장을 만난 고이즈미 일본 총리, 페레손 스웨덴 총리도 또한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도 똑같은 판단을 했다. 나는 제가 경험했던 대북특사 등 북한과 관련된 일들, 김정일 위원장과의 일화 등 모든 것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발표하겠다. 이제 역사적 사실을 많은 국민들이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은 이 정도만 이야기 하겠다. 나도 남겨 두어야 하지 않겠는가? 언제든지 또 초청하시면 유익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갖고 달려오겠다.
 
남북관계라는 민족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옹졸한 판단이며 결국 성공하지도 못한다. 그것은 노무현 대통령의 대북정책이 웅변으로 증명하고 있다. 나는 물론 노대통령의 대북정책을 지지했고 비교적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참여정부는 ‘김대중 정권과 차별화 하겠다’는 옹졸한 정치적 계산으로 더 큰 남북관계의 성공을 이루지 못했다. 대북송금특검만 없었다면 6·15남북정상회담에서 합의된 사항들이 착착 진행됐을 것이고, 노대통령 취임 초에 남북정상회담이 열렸을 것이다. 최소한 지금처럼 임기 마지막 해에 정상회담을 해서 그 성과를 이행하지도 못하고 묻혀버리는 상황은 되지 않았을 것이다.
 
“DJ 등뒤에 숨지말고 고백하라”
 
2007년 10·4 선언이 아니고 2003년 10·4선언이었다면 남북관계의 발전은 어떻게 되었을까를 생각하면 한없는 원망이 앞설 뿐이다. 그런데, 2003년 3월 집권여당이 반대했고 심지어 주무장관인 강금실 법무장관을 포함한 대부분의 국무위원이 반대했던 대북송금특검은 노대통령과 딱 한 사람의 장관이 한나라당의 논리를 원용해 찬성하면서 국무회의를 통과한다.  왜 노대통령은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을 이어 받는다고 하면서도 차별화해야 한다는 옹졸한 정치적 계산을 한 것이다. 실제 2002년 12월 대선 후 인수위가 구성되고 노무현 당선자가 자신의 비서실장 입을 통해 특검 검토 발언을 언론에 흘렸다. 나는 대통령비서실장으로서 노당선자 측근과 당선자비서실장, 인수위 주요 멤버들에게 특검의 부당성과 반대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노당선자는 물론 당시 주요 인사들이 언론을 통해 “왜 DJ에게는 장세동이 없느냐” “DJ 등 뒤에 숨지 말고 나서서 고백하라”고 말하면서도, 나에게는 이회창 후보의 대선자금, 김영삼 대통령의 안기부자금 등 당시의 모든 의혹에 대해 동시에 특검을 하면서 물 타기로 풀자고 했다. 그러나 나는 “그것들은 국내문제이지만 남북 간의 민족문제로 특검을 해서는 안 된다. 또한 외교적으로도 1962년 한일회담의 김종필-오히라 메모를 40년이 넘은 지금도 공개하지 않고 있다. 이를 보더라도 2-3년 전의 민족문제를 공개하는 것은 외교적으로도 안 된다”고 주장했다.
 
참고로 김종필-오히라 메모는 정부가 외교문제를 이유로 공개하지 않다가 43년만인 2005년에 한일수교회담 관련 자료와 함께 공개했다. 하지만 특검은 그들의 계획대로 진행되었다. 나는 당시 청와대 비서관의 건의를 받고 노당선자의 최측근을 만났다. 나의 설명을 들은 그분은 특검반대의 진정성을 이해했다. 그러나 “박 실장님의 정치자금 관계가 있다”라고 했다. 나는 “이 박지원이는 지금까지 정치하면서 정치자금 관계는 다루지 않았다”고 설명하자 그 분도 이해를 하고 자신이 한번 막아보겠다는 의사를 밝혔다만, 그후 그 분은 우리에게 “너무 늦었다, 특검으로 간다”고 통보해 왔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대북송금특검은 노대통령이 김 대통령과의 차별화를 위한 옹졸한 정치적 계산을 한 것이었고, 김 대통령에게 정치적 타격을 주어야겠다는 음모에서 정치자금 관계를 조작했다는 믿음을 지울 수 없다.
 
“노무현 5년은 박지원 징역 5년” 
 
‘노무현 정권 5년은 박지원 징역 5년’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미워하지 않다. 오히려 그들을 평가한다. 그러나 남북문제를 차별화하고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옹졸한 일은 안했어야 했다. 대북송금특검의 결과가 과연 무엇인가? 우리 민족의 미래를 위해 어떤 이익이 있는 것인가?
 
그런데 이명박 정부에서도 잘못된 전철을 되밟는 조짐이 시작되고 있다. 새롭게 출범한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은 미국 부시 대통령의 ‘ABC-Anything But Clinton’정책처럼 ‘ABKR -Anything But Kim dae-jung, Roh moo-hyun’ 정책으로 가는 것 아닌가 생각된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3월 통일부 업무보고에서 “가장 중요한 남북한 정신은 1991년에 체결된 기본합의서”라고 말했다. 이는 우리 민족과 전 세계가 흥분하며 전폭적 지지를 한 6·15공동선언과 104·선언을 사실상 부정하고 묵살한 것이다. 이것은 한나라당 정권이 민주주의와 인권, IMF 경제파탄과 시장경제, 생산적 복지, 대북정책의 ‘잃어버린 50년’. 즉, 자유당을 뿌리로 하는 한나라당의 나쁜 역사로 회귀하려는 것으로 밖에 해석할 수 없다. 민주평화세력의 ‘되찾은 10년’을 전면 부인하겠다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의 ‘비핵개방 3000’은 이미 부시 대통령이 실패한 정책이다. 10년간 북한 주민 1인당 3000달러 국민소득을 얘기하지만 우리는 10년 후면 국민소득 3~4만 달러가 돼서 비교 자체가 안 된다. 통일부는 교재에서 김일성 주석, 김정일 국방위원장 칭호를 뗐다. 북한에서 남측 인사들의 칭호를 떼버리면 우리가 박수를 치겠는가? 이명박 정부는 이처럼 불필요하게 북한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있다. 교재를 변경하고 6.15공동선언과 10.4선언을 준수하지 않는다고 한다. 만약 문제가 있다면 정권이 바뀌었으니 실천을 위해 그러한 부분을 재협상 하자고 제의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북한에서 먼나 요구를 하면 비료와 쌀을 준다고 한다. 부시 대통령은 6년간 강경책을 썼지만 실패하고 결국 햇볕정책으로 돌아섰다. 부시 대통령의 강경정책이 NPT탈퇴, IAEA 요원 추방, 미사일 모라토리움 해제, 마침내 핵실험까지 하게 했다. 지금은 부시 대통령도 햇볕정책으로 돌아와 북·미간 대화를 하고 6자회담을 진척시키고 있다.
 
김영삼 정권 때를 답습해서는 안 된다. 북·미간에 합의하고 우리는 KEDO 돈만 내는 꼴이 반복 되어서는 안 된다. 보수는 미국의 정책과 궤를 같이 한다. 그런데 미국에서 6년간 실시하다가 폐기된 정책을 우리 정부가 시작한다는 것이다. 결국은 이 방법, 즉 햇볕정책 밖에 없기에 햇볕정책은 계승 발전되어야 하고, 남북기본합의서, 6·15공동선언, 10·4선언은 준수되어야 한다. 나는 이명박 대통령에게 희망을 겁니다. 이대통령이 대선 후보일 때 김대중 대통령에게 왔다. 제가 배석했다. 김 대통령은 50분간의 대화중에 20여분 간 햇볕정책에 대해 설명했다. 이명박 후보는 “각하 나의 생각과 똑 같다”라고 다섯 번이나 말했다. 또한, 이대통령이 올해 미국 방문길에서 한 코리아 소사이어티(Korea Society) 연설과 질의응답에서도 햇볕정책이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안했지만, 내용은 햇볕정책과 똑같았다고 한다. 이것은 보스워즈 전 주한미국 대사가 김대중 대통령에게 말하는 것을 제가 옆에서 들었다. 특히 최근에는 희망적인 대북정책의 변화가 시작되고 있기에 나는 이명박 대통령의 대북정책 궤도가 조만간 수정될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있다.
 
역사적으로 기록하고 평가받아
 
김하중 통일부장관은 지난 6월 4일 북한에 옥수수 5만 톤을 지원할 의사가 있다며 북한에 공식적인 접촉을 제안했고, 개성공단 관계와 6·15공동선언, 10·4선언의 준수여부 발언도 왜곡됐다고 해명하며 진전된 자세를 보이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의 결단이 필요하다. ① 가깝게는 금강산에서 열리는 6·15 8주년 민간행사에 예산 등 적극적인 정부 지원이 필요하다.  ② 6·15남북공동선언과 10·4 선언을 준수하겠다는 이명박 대통령의 직접 발언이 필요하다. ③ 인도적 차원에서 조건 없이 쌀과 비료를 지원해야 한다. 미국도 50만톤의 식량을 지원한다. 이러한 제의에도 북한이 응하지 않는다면 북한은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나는 북한이 반드시 대화에 응하리라고 믿는다.
 
우리는 6·15남북정상회담과 6·15공동선언을 언급할 때 항상 ‘역사적인’이라는 수식어를 사용하는데 주나하지 않다. 그만큼 역사적으로 기록하고 평가받아야 마땅하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정리 / 문일석 브레이크뉴스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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