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연차 게이트에 등장한 노무현의 신세

<채수경 칼럼> 씁쓸한 배신의 추억

뉴민주.com | 기사입력 2009/04/01 [08:29]

박연차 게이트에 등장한 노무현의 신세

<채수경 칼럼> 씁쓸한 배신의 추억

뉴민주.com | 입력 : 2009/04/01 [08:29]
신의를 저버리는 것을 배신(背信)이라고 한다. 두 사람이 등을 돌린 모습의 북녘 북(北) 아래 고기 육(肉)이 붙은 등질 배(背)는 고기라는 이익을 놓고 등을 돌린다는 함의가 읽혀지는 바, ‘배신’은 사랑이든 의리든 물질이든 이익과 관련된 믿음을 뒤집는 것을 말한다. 영어권에서의 ‘배신’은 좀 더 세분화된다. ‘betrayal’의 뿌리는 ‘전달하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tradere’로서 잘못 인도하여 죄를 범하게 만드는 것인 반면 ‘treachery’의 뿌리는 ‘속이다’라는 의미의 고대프랑스어 ‘trichier’로서 상대방을 속여 자신의 이익을 취하는 것을 말한다.
 
정치인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모두 배신자다. 이런 저런 공약을 내걸지만 당선되고 나면 현실적인 어려움을 들어 말을 바꾸는 ‘betrayal’을 일삼기도 하고 유권자들을 속여 자신의 부귀와 공명을 도모하는 ‘treachery’도 부지기수다. 정치와는 거리가 먼 일반인들 또한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인 이상 누구나 배신하고 배신당한다”고 극언하기도 한다. 매해 창간기념으로 ‘21세기를 사는 지혜’라는 인터뷰 특강을 개최하고 그 내용을 책으로 엮어오고 있는 ‘한겨레 21’이 지난 해 주제를 ‘배신’으로 정하고 삼성그룹을 ‘배신’한 김용철 변호사의 경험담(?) 등을 간추려 소개한 것도 배신이 일상화됐다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거기서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은 “배신의 고갱이는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생각하고 싶어 하는 헛된 믿음”이라고 주장했고, 정재승 카이스트 바이오·뇌공학과 교수는 “인간은 본능적으로 남을 신뢰하려는 경향이 있어 모두들 배신 앞에서 속수무책”이라고 까발렸으며, 진중권 중앙대 독어독문학과 겸임교수는 “변덕스러운 대중이야말로 배신해야할 대상으로서 배신자가 되지 않으려면 자주 배신해야 한다”는 역설을 펼치기도 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자신을 지지해준 좌파를 배신했나? 좌파가 오바마를 배신하나? 최근 ‘빈곤의 종말’의 저자인 제프리 삭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들인 폴 크루그먼 과 조지프 스티글리츠 등 미국의 대표적인 좌파 지식인들이 오바마 행정부의 경제부양정책에 대해 “납세자돈 수천억 달러를 상업은행에 넘겨주려는 얄팍한 시도” “쓰레기에 돈을 퍼붓는 정책” “강도질이나 다름없다”는 등 원색적인 비난을 쏟아내고 있음에 배신이 인간사회에 공기처럼 퍼져 있다는 것을 또 한 번 실감한다.
좌파의 입장에서 보면 오바마가 좌파의 믿음을 배신한 게 분명하지만 어떻게 해서든 경제를 되살려야할 오바마 입장에서 보면 좌파가 자신을 지붕위에 올려놓고 사다리를 치워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 것인 바, 정치를 하려면 배신하고 배신당할 것을 각오해야 한다는 말이 농담으로만 들리지 않는다.
 
노무현 전 대통령 또한 배신의 추억을 씁쓸하게 곱씹고 있을 것이다. 자신처럼 가방 끈이 짧은데다가 성품까지 우직하고 소탈하여 부담 없는 후원자로 여겼던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이 “전직 대통령을 걸고넘어지면 뭔가 수가 생기겠지”하는 얄팍한 물귀신 작전으로 별별 사소한 것까지 다 까발리면서 자신을 끌고 들어가고 있는 데 대해 극도의 배신감이 느껴지겠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롯한 호남세력의 지지로 대통령에 당선된 후 대북송금특검을 수용하여 김 전 대통령의 최대 업적인 남북화해를 짓이겨버리고 측근 권노갑·박지원 등에 쇠고랑을 채워 콩밥까지 먹인 자신의 배신이 너무나 쑥스러워서 이명박 정권이 뺨을 때리는 데도 피할 생각조차 못하고 우두커니 서서 맞고 있지 않은가?!
 
맞다. 산다는 것은 누군가를 배신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리석어서 자기 자신도 손해를 보고 상대방도 손해를 보는 배신이라면 인생의 쓴맛으로 여기고 기꺼이 꿀꺽 삼키겠지만 알량한 이익을 위해 상대방을 배신했다가 그게 부메랑이 되어 되돌아올 때의 부끄러움과 허망함은 어떻게 삭여야 하나?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만 생각하는 헛된 믿음이 배신의 고갱이라면 나를 배신한 건 바로 나가 아닌가? 결국은 모두들 자기 자신이 스스로를 배신하면서 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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