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나라 관구검을 깨부셨다는 우리 기록들

우리 고구리를 두번 침략한 위나라 관구검을 물리쳤다

성헌식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4/08/17 [22:06]

위나라 관구검을 깨부셨다는 우리 기록들

우리 고구리를 두번 침략한 위나라 관구검을 물리쳤다

성헌식 칼럼니스트 | 입력 : 2014/08/17 [22:06]
모든 중국기록들은 한결같이 관구검과 고구리가 비류수와 양구에서 싸웠다고는 했으나 관구검이 그곳 전투에서 진 사실은 적지 않았다. 두 번 다 고구리 동천왕이 위나라에게 깨지고 도망가 겨우 목숨을 건지고, 관구검이 고구리의 도성을 점령하고 백성들을 도륙했다고 특유의 춘추필법으로 적고 있다.
 
위나라 관구검을 깨부셨다는 우리 기록들
 
그러나 이는 많은 역사적 사실을 뺀 기록으로 실제와는 많이 다르다. 실제 관구검은 두 차례 고구리를 침공했는데, 1차 전쟁은 고구리의 완벽한 승리였다. 고구리 동천태왕이 직접 2만의 군사를 이끌고 나가 위나라 관구검의 1만 군사를 비류수에서 깨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중국은 두 번 다
동천왕이 져서 도망갔다고 적고 있다.
 
남당 박창화 선생이 일본 궁내청에서 베낀 <고구리사초·략>에는 “동양대제 18년(244) 7월에 위나라 관구검이 현토에 쳐들어와 노략질했다. 태왕이 보병과 기병 2만을 이끌고 나가 비류수(沸流水)의 상류에서 이를 받아쳐서 크게 이기고 3천여 목을 베었다. 이를 비수대전(沸水大戰)이라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에도 “20년(246) 가을 8월,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이 1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현토를 침공했다. 태왕이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비류수에서 전투를 벌여 그들을 쳐부수고 3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라는 같은 기록이 있어 고구리 동천태왕은 위나라 관구검과의 1차 비류수 전쟁에서 크게 이긴 것이 확실하다.
 
<고구리사초략>은 관구검의 고구리 침공을 1차와 2차로 구분해 1차 침공연도를 동양대제 18년(244)으로 2차 침공을 20년(246)으로 적은 반면, <삼국사기>는 1차와 2차의 구분 없이 모두 동천태왕 20년으로 적었다. 중국기록은 구분되어 있으나 역사적 사실이 사실과 다르게 적혀 있으며, 두번 모두 고구리 왕이 져서 관구검이 고구리의 도성을 함락했다고 한다.
 
글쓴이는 <고구리사초략>의 기록이 신빙성이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위나라 관구검의 1만 병력 중 3천명이 목을잘린 정도라면 그야말로 기록 그대로 ‘비수대전’이기 때문에 전의를 상실한 관구검이 일단 돌아간 것으로 본다. 그래서 <삼국지 위서 관구검열전>에서 비류수에서 싸운 연도를 명확히 적지 않고 ‘정시 중’이라고 애매하게 적은 것으로 보인다.
 
고구리가 크게이긴 비류수는 어디인가?
 
위나라의 1차 침공 때 고구리 동천태왕이 관구검의 1만 군사 중 3천 명의 목을 베는 대승을 거둔 비류수는 과연 어디일까? <중국고대지명대사전>에서 비류수를 검색하면 강수(絳水)가 나오는데 그 설명은 다음과 같다.
강수(绛水) : 1) 근원은 산동성 황현 동남쪽 20리 장산에서 나와, 북쪽으로 흘러 황현 동쪽에서
황수하와 합해져 바다로 들어간다.
 
2) 산서성 곡옥현 남쪽에 있는 일명 백수 또는 비수(沸水)로 근원은 강현 서북쪽 강산 아래에서
나와, 곡옥현 남쪽까지 서북류해 회수로 들어간다. <수경주> 강수는 강산에서 나와 서북류해
회수로 흘러간다.
 
3) 근원은 산서성 둔류현 서남 팔십리 반수산의 남쪽에서 나와 여덟 개 샘이 솓는 여의에서 나와 합쳐져 동류해 로성현 경계 교장촌까지 흘러 장하로 들어간다. <수경주>의 이른바 진수이다.
 <청일통지> 수경주에 강수는 있고 람수는 없는데, 그 강수의 흐름은 모두 지금의 람수이고 별도로 진수가 있는데 곧 강수의 흐름이라 현재 부·현의 모든 지리지와 맞지 않는다. 위서지형지에
강수가 있고 역시 람수도 있으나 지금의 물길은 같다.
 
4) 사천성 간양현 성 북쪽에 있는 지금의 강계하를 말한다. (이하 생략)
 
(원문) 绛水 : 1) 源出山东黄县东南二十里张山,北流经县东合黄水河入海。
 
2) 在山西曲沃县南, 一名白水 又名沸水, 源出绛县西北绛山下, 西北流至曲沃县南入浍水,
《水经注》绛水出绛山, 西北流注于浍。
 
3) 源出山西屯留县西南八十里盘秀山之阴, 八泉涌出如珠, 合而东流 至潞城县界交漳村入漳.
水经注谓之陈水, <清一统志>水经注有绛水而无蓝水, 其绛水所行之道, 皆今蓝水也, 而别有陈水, 则今绛水所行之道也, 与今府县诸志不合, 惟魏书地形志有绛水, 又有蓝水, 与今水道相同。
 
4) 在四川简阳县城北,今曰绛溪河,《寰宇记》绛水在州南,色赤如绛,故名,王洙九州要记云,州在赤水之北是也。
 
 ▲ 관구검기공비를 집안으로 옮겨다놓고는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중국. <이미지=필자제공>

동천태왕 18년(244) 고구리가 위나라 관구검의 1차 침략 때 크게이긴 비류수는 위 네 가지 강수
중에 2)번으로, 산서성 남부 운성시의 동쪽에 있는 강현에서 나와 임분시의 남쪽 곡옥현 남쪽을 흐르는 회수로 들어가는 작은 물길이었던 것이다.
 
역사적 사실이 이러하거늘 1906년 관구검기공비가 길림성 집안현에서 발견되었다는 이유로 집안이 당시 고구리의 도성인 환도성이라는 것은 역사조작이 아닐 수 없다.
 
관구검의 재침공 때 자만한 동천태왕
 
<삼국사기>에는 관구검의 침략이 한 번 있었던 것으로 적혀 있다. “20년(246) 가을 8월,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이 1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현토를 침공했다. 태왕이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비류수에서 전투를 벌여 그들을 쳐부수고 3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1차 침공에서 따옴)
 
또 군사를 이끌고 양맥의 골짜기에서 전투를 벌여 역시 적군을 쳐부수고 3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태왕이 여러 장수들에게 "위나라 대군이 오히려 우리의 적은 군사만도 못하구나.
관구검이란 놈은 위나라에서는 명장이라 하나, 지금은 그의 목숨이 내 손에 달려 있다"고 말하고 철갑기병 5천명을 거느리고 공격했다.
 
 ▲ 관구검 침공과 관련된 지명인 비류수와 양구는 산서성 남부에 있는 강. <이미지=필자제공>

위와 같이 고구리 동천태왕은 관구검의 2차 침공 때도 초전에서 3천명을 죽이거나 사로잡는
큰 전과를 올렸다. 그러한 전과를 올린 곳이 <삼국사기>에는 ‘양맥(梁貊)의 골짜기’라고 적혀있고, <삼국지 위서 관구검열전>과 <고구리사초·략>에는 양구(梁口)라고 적혀 있는데, 양구는 바로 양수(梁水)의 입구를 말하는 것이다.
 
양수를 <중국고대지명대사전>에서 찾으면 “양수는 산서성 장자현 동쪽에 있다. <수경주>에 양수는 남양산에서 나와 북류해 장자현 고성 남쪽까지 흘러 북쪽에서 장수로 들어간다. (梁水: 在山西长子县东,《水经注》 梁水出南梁山,北流至长子县故城南,又北入漳水)”라고 설명하고 있다. 관구검의 1차 침공 때 전투를 벌인 비류수의 동북쪽에 있는 강이다.
 
양구에서의 크게 이긴데 취한 나머지 극도의 자만에 빠진 동천태왕은 아예 관구검과 위나라 병사들을 전멸시키기 위해 무모하게 정면공격을 감행한다. 막다른 골목에 몰리게 된 관구검이 방진(方陣)을 치고 결사적으로 싸우자, 이번에는 오히려 고구리 군사가 크게 깨져 1만8천여 명이 전사했다. 자만하다 허를 찔려 크게 깨진 태왕은 1천여 기병을 거느리고 압록원으로 달아났다.
 
방진이란 방패와 창으로 중무장한 보병이 어깨를 맞대고 보통 8열종대로 늘어서는 전술대형으로, 말을 타거나 땅 위에서 활을 쏘는 사수들의 공격에는 다소 약점이 있으나 철갑기병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는 효과적인 단단한 수비대형이다. 수양제의 고구리 1차 침공 시 평양성까지 진군했던 우문술의 30만 대군이 후퇴하면서 사용한 수비전술이다.
 
 ▲ 역사왜곡된 중국의 이론과 같은 한국사학계의 관구검침공도 <이미지=필자제공>
<고구리사초략>에는 “동양대제 20년(246) 8월 임금께서 관적(관구검)이 우회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우근 등을 보내 맞서 싸우게 했다. 그러나 우리는 수가 적고 저쪽은 수가 많은데다가 그들의 예봉을 마주하더니 자못 전황이 상당히 어려워졌다. 이에 상께서 철갑기병 5천을 추려서 양구(梁口) 서쪽에서 적진을 들이쳐 크게 이겼고, 빼앗은 병장기와 말은 셀 수 없이 많았다. 상이 주황후와 함께 포로를 맞이했다.
 
관구검의 대군이 또 다시 밀려오니 우근이 싸우다 전사했다. 관구검이 방진을 펼쳐 선봉의 위세가 파죽지세인데다가 우리의 남쪽통로도 빼앗겼다는 보고가 들려오자, 후비들까지 데리고 있는데다가 상황이 녹녹치 않아 날랜 기병 천여기와 함께 압록원으로 물러났다. 주전의 군대마저 깨져 죽은 병사가 만 명이나 되자, 상께서 옹구(壅口)로 동천했다”라고 적혀 있다.
 
즉 동천태왕이 두 번 모두 관구검에게 진 것이 아니라 동천태왕이 몸소 지휘한 비류수(1차)와
양구(2차)에서는 크게 이겼다. 그러나 이후 관구검이 다시 침공한 전투에서 출전한 장수들이 크게 지자 동천태왕은 도성인 환도성을 내어주고 작전상 후퇴를 할 수 밖에 없는 비극적인 처지가 되고만 것이었다. 그러면서 고구리는 후퇴하며 대역전승을 거둘 작전을 세울 시간을 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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