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 연일 YS에 직격탄,"DJ모독말라"

전남대 특강, “말로만 DJ와 화해 진정성 보여야"

문일석 | 기사입력 2009/11/10 [11:52]

박지원, 연일 YS에 직격탄,"DJ모독말라"

전남대 특강, “말로만 DJ와 화해 진정성 보여야"

문일석 | 입력 : 2009/11/10 [11:52]
▲  박지원 의원    ©뉴민주.com
민주당 박지원 정책위의장은 “사회통합과 문화강국은 민주주의를 하면 다 해결된다”고 말했다.
박 의장은 11월 10일 오후 전남대 법학대학원 대강당에서 열린 비전한반도포럼 주최의 ‘행동하는 양심-김대중 사상 대강좌’ 초청 특강(주제=김대중 대통령과 사회통합 그리고 문화강국)에서 “민주주의를 통해 균등인사와 균형발전을 하면 동서화합이 되고, 민주주의를 통해 북한에 쌀과 비료를 지원하고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북미간 북핵문제 해결에 주도적 역할을 하면 민족간 냉전도 종식되고 언젠가는 통일도 된다”면서 “민주주의를 통해 지원은 하되 간섭하지 않으면 문화강국이 된다”고 강조했다.
 
박 의장은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해 “사회통합의 가장 근본적인 과제인 민주주의와 독재의 충돌, 동서간의 갈등, 남북 민족 간의 냉전을 종식시키기 위해 어느 누구보다 혼신의 노력을 했고, 죽음에 이르는 박해와 헤아릴 수 없는 오해를 감수했다”며 “서거하시기 직전까지 화해와 용서를 다시 한번 보여주었고, 김대중평화센터 이희호 이사장은 서울광장 인사말에서 김대중 대통령의 유지는 ‘화해와 용서’이며 ‘행동하는 양심’이라고 거듭 강조해 국민들을 감동시켰다”고 말했다. 
 

박 의장은 “김대중 전 대통령은 군사쿠데타와 유신, 5.18과 이어진 군사독재와의 투쟁, 노태우 전 대통령으로부터 제일 먼저 3당합당을 제안 받았지만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 때문에 거절했다”고 밝히고 “그 결과 1997년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여야간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룩했고, 국민은 민주주의와 독재의 지루한 갈등을 민주주의의의 승리라는 사회통합으로 결론지어 줬다”고 말했다.
 
박 의장은 김영삼 전 대통령이 최근 김대중 전 대통령을 ‘독재자, 1년 반 동안 뒤를 캐고 청문회에 나오게 하려고 했다’고 주장한데 대해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는 단연코 그런 일이 없었다”며 “검찰에서 안기부 대선자금을 수사한 일이 있었지만 그 내용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최측근 중 한명인 강삼재 당시 신한국당 사무총장이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서 건네받은 1,192억원을 안기부 구좌에 넣고 대선자금으로 사용했다고 진술하여 대법원에서 확정판결이 난 사건”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박 의장은 “이렇게 엄연한 사실을 떠넘기려고 한다거나 당신 스스로 독재자라고 비판하던 전두환․노태우당과 3당야합으로 대통령이 되었다면 국민 앞에 자숙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또한 “국민 앞에 수차례 화해했다고 말씀했다면 진정으로 화해했어야 한다”며 “침도 마르기 전에 사실도 아닌 말씀으로 번복하는 것은 역시 김영삼 전 대통령다운 편리한 방식의 삶”이라고 거듭 비판했다.
 
박 의장은 “박정희 전 대통령은 호남에 대해 문화적으로, 지역개발에서, 그리고 인사에서 집요하고 계획적으로 차별했고, 7대 총선에서 김대중 후보를 낙선시키기 위해 목포에서 두 차례 지원유세를 하고 국무회의까지 했고, 일본에서 납치해 살해하려고 했다”며 “전두환 정권에서도 사형선고를 내렸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은 박정희 기념사업을 위해 국고 200억원 지원을 결정했고, 백담사에 유배된 전두환 전 대통령을 헌납을 약속한 연희동 사저로 돌아오도록 합의해 주는 등 용서했다”고 말했다. 박 의장은 “김대중 대통령께서는 ‘가해자가 자신의 잘못을 사죄 또는 사과하면 화해를 이룰 수 있지만 이를 거부하면 용서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며 “이것이 김대중 대통령의 용서와 화해”라고 강조했다.

박 의장은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해서도 TK출신의 김중권 비서실장을 초대 비서실장으로 임명했고, 네 명의 총리 중 영남 2명, 충청․경기 1명 등 인사와 지역발전에 균형을 이뤘으며, 예산도 16개 광역단체장을 모두 서울로 오게 해 그 앞에서 예산을 배정했다”고 말하고 “김대중 대통령의 화해와 용서의 리더십은 도덕적 지도력과 역사에 대한 믿음에서 나왔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박 의장은 “김대중 대통령은 1970년 대선후보 때 미․일․중․소 4대국이 한반도의 안전을 보장해야 한다는 4대국 안전보장론으로 일거수일투족에 빨간색 덧칠을 당했지만, 한 번도 굴하지 않고 민족문제에 헌신을 다했다”며 “대통령 취임사에서 언제 어디서나 남북정상회담을 갖자고 했고, 베를린선언을 하면서 저를 싱가폴로 보내 비밀접촉을 갖도록 해 분단 반세기만에 역사적인 6.15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켜, 이산가족상봉, 금강산관광, 개성공단 등 많은 남북 간 교류협력을 이뤄냈다”고 설명했다.
 
박 의장은 “김대중 대통령은 한국의 민주주의 인권신장, 동티모르 독립, 아웅산 수치 여사 지원, 한일관계 발전 등 동아시아의 민주주의 증진, 한반도 평화를 위한 평생의 노력과 남북정상회담을 평가받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고, 퇴임 후에도 세계적 평가와 국민적 존경이 날로 높아졌다”며 “1주일에 3일씩 투석을 하면서도 민주주의, 서민경제, 남북문제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하실 수 있는 일을 모두 했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특히 이명박정부의 꼬여가는 대북정책에 큰 실망을 했지만 방한한 클린턴 국무장관과 보즈워스 특사, 중국의 모 고위인사 등과의 의견교환을 통해 자신감을 찾았다”고 말하고 “김대중 대통령은 북핵문제는 북미간에 해결되고 남북은 6.15공동선언으로 돌아가서 주도적 역할을 하라고 했고, 올 가을부터 북미간 대화가 시작되고 연말이면 본격화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점쟁이는 아니지만 정확히 예측했다”고 말했다.
 
박 의원은 “남북정부는 6.15공동성명으로, 북미 정부는 9.19선언으로 가면 해결된다. 이명박 대통령도 정상회담을 위한 비밀특사 접촉을 사실상 인정하는 등 변화의 징조가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며 “비밀특사를 교환해 남북정상회담을 조속히 개최함으로써 한반도 문제의 변방에서 헤매지 말고, 중심으로 돌아오라”고 강력히 권고했다. 박 의장은 “문화를 위해서도 민주주의가 가장 중요하다”며 “김대중 대통령의 문화정책은 ‘지원은 하되 간섭은 않는다’는 것”이라면서 “문화예술인들은 독창적 사고와 행동을 하는데 무엇을 하지 말라고 하면 창작력이 막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박 의장은 “김대중 대통령은 IMF외환위기 당시 모든 정부 공사를 중단시켰지만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은 건설공사를 계속하도록 지시했고, 기무사를 이전해 경복궁, 민속박물관, 인사동과 연결하는 문화벨트 조성, 인사동 조성 발전, 이문동 국정원터에 예술종합학교와 연계해 제2의 예술의 전당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일본대중문화도 개방해 우리 대중문화를 발전시키자고 했다”고 말했다. 이어 “김대중 대통령은 우리나라 예산사상 처음으로 문화예산 1% 시대를 열었다”며 “한류는 그냥 온 것이 아니라 지원은 하되 간섭하지 않은 김대중 대통령의 문화예술 정책의 결과”라고 말했다.
 
박지원 정책위의장 강연문(전문)
 
김대중 전 대통령은 서거하시기 직전까지 화해와 용서를 다시한번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김대중평화센터 이희호 이사장은 국장 때 전국에 TV로 생중계된 서울광장 인사말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유지는 ‘화해와 용서’이며 ‘행동하는 양심’이라고 거듭 강조하여 국민들을 감동시켰다. 온갖 차별의 피해자였던 그 분은 우리나라 사회통합의 가장 근본적인 과제인 ①민주주의와 독재의 충돌 ②동서간의 갈등 ③남북 민족 간의 냉전을 종식시키기 위해 어느 누구보다도 혼신의 노력을 했고, 죽음에 이르는 박해와 헤아릴 수 없는 오해를 감수했다. 그 분은 이미 노장청의 조화로 세대 간의 통합을 실현했고, 호주제 폐지와 여성부창설 등을 통해 여성권익을 향상시킴으로서 양성간의 통합도 이뤄냈다.
 
첫째, 민주주의를 위한 그 분의 평생에 걸친 헌신을 논하지 않더라도 군사쿠데타와 유신, 5.18과 이어진 군사독재와의 투쟁, 노태우 전 대통령으로부터 제일 먼저 3당통합으로 대통령이 되는 길을 제안 받았지만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 때문에 거절했던 사실을 우리 국민은 알고 있다. 그 결과 1997년 12월 대선에서 우리 국민은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여야간 평화적 정권교체라는 쾌거를 이뤄냈고, 그 분을 대통령에 당선시킴으로써 민주주의와 독재의 지루한 갈등을 민주주의의 승리라는 사회통합으로 결론지어 주었다.
 
나는 김영삼 전 대통령은 “DJ와 40년간 정치적 동지이자 경쟁자였다. 화해를 했다”고 말씀하시며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입원 중에는 병문안을 해 주시고, 서거 시에는 신촌세브란스 영안실을 조문했으며, 국장 영결식에도 참석해 주신데 대해 감사를 표한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감사 인사차 방문한 저희에게 동교동과 상도동계의 만찬을 제안했지만 나는 “비록 49재를 종교적 사유로 모시지는 않지만, 국민들이 마음속으로 애도하고 49재를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시니 연기하자”고 사실상 거절한 바 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렇게 모든 국민이 TV로 지켜보는 가운데 화해했다고 말했던 분이 최근 모 주간지와의 인터뷰에서는 “DJ 는 독재자다. 1년 반 동안 내 뒤를 캐고 청문회에 나를 나오게 하려고 했다”는 등 험담을 또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시절에 단연코 그런 일이 없었다고 나는 말씀드린다.
 
검찰에서 안기부 대선자금을 수사한 일이 있었다. 그 내용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최측근 중의 한 분인 강삼재 전 신한국당 사무총장이 김현철씨 등과 재판을 받으면서 1,192억원을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서 건네받아 안기부 구좌에 넣고 대선자금으로 사용했다고 진술하여 대법원 확정판결이 난 사건이다. 이렇게 엄연한 사실을 떠넘기려고 한다거나 당신 스스로 독재자라고 비판하던 전두환․노태우당과 3당야합으로 대통령이 되었다면 국민 앞에 자숙해야 한다. 또한 화해했다고 수차례 국민 앞에서 말했다면 진정으로 화해하셔야지 침도 마르기 전에, 사실도 아닌 말로 번복하는 것은 역시 김영삼 전 대통령다운 편리한 방식의 삶이라고 본다.
 
둘째, 동서간의 갈등해소를 위한 노력이다. 박정희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은 호남의 몰표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박정희-윤보선의 대결에서 박정희 후보는 영남과 호남에서만 승리했고 다른 지역에서는 완패했다. 특히 호남에서 35만표를 앞서서 다른 지역의 패배를 상쇄하고 16만표 차이로 당선되었다. 노무현 대통령도 호남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보다 더 많은 표를 받았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은 호남에 대해 문화적으로, 지역개발에서 그리고 인사에서 집요하고 계획적으로 차별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7년 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를 낙선시키기 위해 목포에서 두 차례나 지원유세를 하고 전 각료가 참석하는 국무회의를 여는 등 온갖 부정선거를 했다. 일본에서 납치해 살해하려 했고 전두환 정권에서는 5.18을 빌미로 사형선고를 했다. 그러나 김대중 전 대통령은 용서했다. 박정희 기념사업을 위해 200억원의 국고지원을 결정했고, 백담사에 유배돼 있던 전두환 대통령이 헌납을 약속한 연희동 사저로 돌아올 수 있도록 당시 노태우 대통령 측과 합의해줬다. 자신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던 신군부세력의 우두머리도 용서했다. 김현철은 사면했고 노무현 대통령도 엄연히 수사해야 할 김영삼 전 대통령의 대선자금 1,192억원을 덮었다. 최근 작고한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에게도 이희호 이사장님은 조화를 보내 명복을 빌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가해자가 자신의 잘못을 사죄 또는 사과하면 화해를 이룰 수 있지만, 이를 거부하면 용서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것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용서와 화해이다.
 
대통령 선거운동을 할 때에도 참모들은 “영남에 가 봐야 표가 안 나오니 수도권과 충청권에 집중하자”고 했지만 그 분은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려는 사람이 그럴 수는 없다”고 했다. 그런 참모의 발언이 당시 모 신문 가판에 보도되자 저를 보내 국가를 위해 보도해서는 안된다고 설득하도록 했다.
 
대통령에 당선해서도 TK출신 김중권 비서실장을 첫 번째 비서실장으로 기용했고, 국민의정부 네 분의 총리 중 두 분이 영남 출신이며 나머지 두 분도 충청․경기 출신으로 인사와 지역발전에 균형을 이루었다. 예산도 16개 광역단체장을 모두 서울로 오게 해서 예산청장, 기획예산위원장까지 참석시키고 그 앞에서 예산을 배정했다. 모두 수긍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소위 동진정책에 노력했지만 결과적으로 동서간의 갈등을 극복하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이처럼 김대중 전 대통령이 보여준 화해와 용서의 리더십은 첫째 도덕적 지도력, 둘째는 역사에 대한 믿음에서 나왔다고 생각한다. 도덕적 지도력은 삶 자체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만이 구현할 수 있다. 또 박해받은 사람만이 실천할 수 있다. 도덕적으로 아무 거리낌이 없으니 화해와 통합을 외칠 수 있었던 것이다. 
 
역사에 대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믿음 또한 확고했다. 자신을 죽이려한 독재자들에게 보복을 하지 않은 것은 우리가 민주주의를 피로써 얻어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피는 개인이 아니라 대중의 것이었고, 결국 대중의 뜻을 따르는 것이 보복의 사슬을 끊는 것이라 생각하신 것이다. 비록 민주화투쟁에서 희생당했지만 그들이 원하는 것은 민중이 주인인 세상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통령은 화해와 용서가 우리 사회를 통합시키고, 민주주의를 완성하는데 진일보할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셋째, 남북간 분단해소와 평화정착을 위한 평생의 헌신이다. 현재의 6자회담은 1970년 대통령 후보 때 밝힌 4대국 안전보장론에서 출발한다. 박정희 대통령이 모든 정적을 공산당으로 몰아 부칠 때 그 분은 미․일․중․소 4대국이 한반도에서 안전을 보장해야 한다고 했으니 얼마나 박해가 많았겠습니까? 김대중 전 대통령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에 빨간색 덧칠을 했다. 그러나 한 번도 굴하지 않고 민족문제에 헌신을 다했다. 대통령 취임사에서도 언제, 어디서나 남북정상회담을 갖자고 제의했다. 2000년 3월 베를린선언을 하면서 저를 싱가폴로 보내 북한 특사와 비밀접촉을 갖게 하여, 분단 반세기만에 역사적인 6.15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켰다.
 
이산가족상봉, 금강산관광, 개성공단 등 얼마나 많은 남북 간의 교류협력이 이뤄졌는가? 전 세계는 물론 UN도 김대중 전 대통령의 햇볕정책을 지지했다. 마침내 한국의 민주주의와 인권신장, 동티모르 독립, 아웅산 수치 여사 지원, 한일관계 발전 등 동아시아의 민주주의 증진, 한반도 평화를 위한 평생의 노력과 남북정상회담을 평가받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퇴임 후에도 오히려 세계적 평가와 국민적 존경이 날로 높아졌다. 국내외에서 밀려오는 초청강연과 언론인터뷰, 주요 인사들의 방문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한번에 4~5시간, 일주일에 3일씩 투석을 하시면서도 민주주의, 서민경제, 남북문제의 위기를 걱정하고 당신이 하실 수 있는 일을 모두 했다. 특히 금년도부터 이명박 정부의 꼬여가는 대북정책에 큰 실망을 했지만, 방한한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 보즈워스 특사, 중국의 모 고위인사 등과의 의견교환을 통해 자신감을 찾았다. 마침내 금년 4월 중국인민외교학회 초청으로 중국을 방문하여 시진핑 국가부주석등 중국 중요 지도자 및 학자들과 회동을 가졌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5월 18일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과의 만찬회동을 통해 북한 핵문제 해결과 남북관계 개선에 대한 방향을 잡았다.

나는 이러한 모든 자리에 영광스럽게 배석을 했다. 클린턴 전 대통령은 오바마-힐러리 클린턴의 대북정책이 ‘김대중-클린턴의 햇볕정책’이라고 확인했으며, 김대중 전 대통령의 고견과 전해 주신 중국 지도자들의 견해 등을 귀국하자마자 오바마 대통령과 클린턴 국무장관에게 전하겠다고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클린턴 국무장관에게 보내는 서신을 이 자리에서 전달했다. 이제 김대중 전 대통령은 북핵문제는 북미간에 해결되고 남북은 6.15공동선언으로 돌아가서 주도적 역할을 하라고 하셨으며, 북미간에는 올 가을부터 대화가 시작되고 금년 말이면 본격화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지금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가?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점쟁이가 아니지만 정확히 예측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알아야 한다. 이 길 밖에 없기에 이 길로 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도 가야한다. 남북정부는 6.15공동성명으로 북미정부는 9.19선언으로 가면 해결된다. 참고로 9.19선언은 첫째, 북한은 핵을 폐기한다. 둘째, 미국은 북한과 수교한다. 셋째, 6자가 협력해 한반도평화체제를 구축한다. 넷째, 5자는 북한에 식량과 에너지를 제공한다. 다섯째, 모든 것은 행동대 행동 원칙으로 한다는 것이다.
 
일본도 민주당 집권으로 대북정책이 바뀌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도 바뀌는 징조가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비밀특사접촉이 있었다는 것도 사실상 인정했다. 지금은 정상회담의 안개를 피우면서도 확 바뀌지 못하고 있지만 김영삼 전 대통령처럼 큰소리만 치다가 미국으로부터 왕따를 당하고 제네바 협정으로 KEDO 분담금만 부담하는 망신을 당해서는 안된다. 이명박 대통령은 비밀특사를 교환해 남북정상회담을 조속히 개최함으로써 한반도 문제에서 변방을 헤매지 말고 중심으로 돌아오라고 강력히 권고해마지 않는다.
 
이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문화강국 정책을 말하겠다. 한마디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문화정책은 ‘정부는 지원은 하되 간섭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원이가 문화부장관을 했다. 모든 문화예술인들은 독창적 사고와 행동을 한다. 그런데 ‘무엇을 하지 말라’고 하면 창작력이 막힌다. 문화를 위해서도 민주주의가 가장 중요한다. 영화를 검열해서 잘라내고 ‘태백산맥’을 반공법 위반이라고 한다면 문화예술인들이 창작력을 발휘할 수 있겠는가? 김대중 전 대통령은 ‘지원하기 위해’ 영화진흥위원회를 설치하고 ‘간섭 않기 위해’ 영화 사전검열을 폐지했다. 그랬더니 때 맞춰 우리의 이념과 현실을 가감 없이 녹여낸 <쉬리>와 <공동경비구역 JSA>가 탄생했다. 이것은 하나의 상징이다. 민주주의는 이렇듯 소중한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IMF 외환위기로 모든 정부의 건설공사를 중단시켰지만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 건설공사를 계속하도록 했다. 청와대 옆의 기무사 자리에 ‘고층의 기무사 건물을 재건축하겠다’고 했지만 “기무사를 교외로 이전시키고 그 터에 미술관을 지어 경복궁, 민속박물관, 인사동과 연결하는 문화벨트를 조성하라”고 했다. 오늘의 인사동도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 본격적으로 조성 발전시켰다. 이문동 국정원 자리에 예술종합학교와 제2의 예술의 전당을 만들어 서울 북부권과 경기도 북부권의 문화예술의 전당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고 했다.
 
우리 민족은 수 천 년간 중국의 지배를 받았지만 동화되지 않고 우리 고유의 문화와 접목시켜 유교도 조선유학으로, 불교도 해동불교로 발전시켜 일본에 전수시킨 우수한 민족이다. 그래서 일본으로부터 밀려오는 대중문화를 개방하여 불량 대중문화는 버리고 좋은 대중문화만을 받아들여 우리 대중문화를 발전시키자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대중문화가 일본 대중문화에 침식된다고 반대했다. 일본대중문화가 이겼는가? 우리 대중문화가 일본에서 어떠한가? 심지어 동남아 등지에서 TV 연속극 필름을 무료로 공급하여 이제는 전 세계에서 우리 드라마를 시청할 수 있게 했다. 영화계에도 1,500억원의 영화진흥기금을 지원했고, IMF 외환위기 때에도 ‘찾아가는 문화관광부’로 도서벽지까지 문화예술 행사를 갖게 하여 연극인들에게 공연기회를 드렸다. 문학인들에게는 스토리 뱅크 등을 통한 지원을 했고, 심지어 TV사극을 장려하여 원로배우와 단역배우의 출연기회도 확대했다. 우리나라 예산사상 처음으로 문화예산 1% 시대를 열었다. 한류는 그냥 온 것이 아닙니다. 지원은 하되 간섭하지 않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문화예술 정책의 결과이다.
 
한중 정상회담 때 장쩌민 주석이 ‘대발이 아저씨’를 말해 김대중 전 대통령이 무척 기뻐했다. 중국 지도자들이 저에게 한류에 대해서 물었다. 그래서 나는 “민주주의를 하면 문화가 꽃 핀다”고 대답했다.
 
‘김대중과 사회통합 그리고 문화강국’ 결론은 하나이다. 민주주의를 하면 다 해결된다. 감리교, 언론, 사법부가 올바른 길을 갔기에 오늘의 영국이 되었다. 민주주의를 통해 균등인사, 균형발전을 하면 동서화합이 된다. 민주주의를 통해 북한에 쌀과 비료를 지원하고,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북미 간에 북핵문제를 해결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면 민족 간의 냉전도 종식된다. 언젠가는 통일이 된다. 민주주의를 통해 지원은 하되 간섭하지 않으면 문화강국이 된다. 오늘 더욱 김대중 전 대통령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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