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신묘년'토끼해를 맞이하여!

'신묘년'은 10간의 8번째인 신과 12지의 4번째인 묘가 조합되었다

정성수 시인 | 기사입력 2011/01/02 [10:07]

2011년 '신묘년'토끼해를 맞이하여!

'신묘년'은 10간의 8번째인 신과 12지의 4번째인 묘가 조합되었다

정성수 시인 | 입력 : 2011/01/02 [10:07]
전북대학교 예술대학 정문 앞 길가에 토끼 사육장이 있다. 철조망에 내걸린 안내문에는 ‘이 곳의 토끼는 친환경 농산물 생산의 일환으로 사육되고 있습니다 -전북대학교 원예학과 과수원 예약 실험실-’ 이라고 씌여 있다. 아마 실험이나 교육목적으로 기르는 게 아닌가 한다.

30여 마리 토끼들이 오순도순 사는 모습은 평화롭고 신기하기까지 하다. 토끼들은 개들처럼 짖어대지도 않고 돼지들처럼 먹을 것에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닭들처럼 정신없이 먹이를 쪼아대지도 않는다. 먹을 것을 사이에 두고 조용히 그리고 사이좋게 먹는다. 마치 한 가족인양 서로를 배려하는 것이다.

철망 사이로 먹이를 밀어 넣어주면서 요즘같이 각박하고 자기 것만 챙기는 세태를 생각해 본다. 며칠 전부터 내린 눈이 사육장 흙바닥을 덮고 있다. 눈 위를 한가롭게 오가는 흰토끼, 갈색토끼, 잿빛토끼, 검정토끼 볼수록 귀엽다. 방금 눈밭을 헤치고 주워 온 배추 잎은 토끼들에게 내밀면서 신년을 생각한다.

2011년은 신묘년(辛卯年)이다. 10간(干)의 8번째인 신(辛)과 12지(支)의 4번째인 묘(卯)가 조합되어 “신묘(辛卯)년 토끼 해”가 된 것이다.

 
▲ 토끼의 설화에서도 볼 수 있듯이 토끼는 몸집이 크고 힘이 센 동물에게 의롭게 맞서고, 다른  짐승들에게는 영민하면서도 민첩한 동물로 그려진다.

 
옛 이야기 속에서 동그랗고 큰 눈에 귀엽고 사랑스러운 토끼는 힘이 약하고 몸집은 작지만 매우 영특한 동물로 묘사되고 있다. 호랑이를 물리친 토끼나 자라를 속이는 토끼의 설화에서도 볼 수 있듯이 토끼는 몸집이 크고 힘이 센 동물에게 의롭게 맞서고, 다른  짐승들에게는 영민하면서도 민첩한 동물로 그려진다.

우리 선조들은 밤하늘의 달을 보며 계수나무 아래에서 불로장생의 약방아를 찧고 있는 토끼를 상상했다. 토끼는 이렇듯 평화로운 이상 세계에서 사는 장수(長壽)의 상징이 되어 왔다.

고구려 덕화리 고분벽화에도 장수의 상징인 두꺼비와 함께 옥토끼가 등장하고 있고, 정월 들어 첫 번째 토끼날인 상묘일(上卯日)에는 실을 짜거나 옷을 지으면 장수한다고 해서 부녀자들이 실을 짜고 옷을 짓거나, 베틀에 한 번씩 밟아 보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선조들은 토끼를 통해 지혜와 평화의 의미를 되새겼다. 전통문화 속 토끼는 몸집은 작지만 영특한 동물로 그려졌다. 위기를 돌파해가는 ‘꾀보 토끼’의 이미지는 전통예술 곳곳에 스며있을 뿐만 아니라 토끼가 포함된 ‘십이지신(十二支神)’은 한·중·일 공통의 문화코드이기도 하다. 

 
● ‘토끼는 지혜와 꾀의 상징’

이야기 하나

‘토끼전’에는 토끼가 거북의 꾐에 빠져 거북이를 따라 용궁에 갔다가 빠져나오는 장면이 있다. 이 ‘토끼전’은 삼국사기에 나오는 민족설화이다. “김춘추가 토끼한테 배워 위기를 극복했다는 이야기 한 도막”을 보면 642년, 백제는 신라를 공격하여 많은 성을 함락시킨다.

이에 위기를 느낀 신라는 구원을 요청하기 위해 후에 신라 제29대 태종무열왕이 되는 김춘추를 고구려에 파견한다. 당시의 고구려는 보장왕이 왕위에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연개소문이 무력으로 정권을 잡고 있는 상황이었다.

연개소문의 계략으로 보장왕은 백제의 옛 땅인 아목현과 죽령의 땅을 돌려 달라고 요구하며, 약조를 할 때 까지 김춘추를 별궁에 감금시켰다. 김춘추는 고구려의 신하 선도해에게 뇌물을 받치고 살려주길 부탁했다.

이 때 선도해는 뜻밖에도, 간을 빼앗길 뻔한 토끼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여기에서 힌트를 얻은 김춘추는 ‘내가 신라로 돌아가서 왕을 설득해서 땅을 돌려주겠노라’고 하고는 풀려나 냅다 신라 땅으로 도망간다. 여기서 도망갔다는 말을 요즘에 ‘토끼’고 말았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당시 ‘별주부전’에 관한 기록으로 토끼가 지혜로움과 슬기의 상징으로 해석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이야기 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이야기로 고려 태조 왕건이 견훤의 후백제를 치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백두대간을 넘어 고모산성 부근에 도달했을 때 더 이상 진군을 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토끼 한 마리가 벼랑을 타고 달아났다. 왕건은 군사들을 이끌고 토끼가 간 길을 따라 진군해 무사히 이 구간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경상북도 문경시 ‘토끼비리’라는 지명의 유래로 고려 태조가 이 지역에서 진퇴양난의 어려움에 처했을 때 토끼가 절벽을 따라 뛰어가며 길을 안내했다는 전설이다. 그 후 ‘토끼길’이란 뜻으로 토천(兎遷)이라 불렀다고 한다. 문경 사람들은 토끼비리라고 부른다. 비리는 문경 지역 방언으로 벼랑이라는 뜻이다. 

 
● ‘토끼관련 민담(民譚)과 상징’

설화에서 토끼는 힘이 약하고 몸집이 작은 것과는 달리 매우 영특하고 착한 동물로 묘사하였으며, 옛날 사람들은 달 속의 토끼 형상을 보고 이상 세계를 꿈꾸었다고 한다.

 
달 속에 사는 토끼는 불로장생의 존재로 상징

토끼는 달의 정령이기도 했다. 옛날 사람들은 달 속의 계수나무 아래에서 방아 찧는 토끼 형상을 보고 ,달 속에는 아무 근심 걱정 없이 영원히 살 수 있는 신선 세계가 있다고 믿었다. 이런 의미에서 달 속에 사는 토끼는 장수의 의미이자 불로장생의 존재로 상징되기도 한다.

특히 달속 계수나무 밑에서 옥토끼가 절구에 불사약을 찧고 있다는 신화는 그 연원이 너무나 깊어 이미 중국에서는 진한(秦漢) 시대 이전에도 보인다. 뿐만 아니라 한 대(韓代)에 들어서는 서쪽을 관장하는 여신인 서왕모(西王母) 신앙이 열풍을 일으키면서 이 시대의 각종 고고 미술품에 단골 소재로 등장하기도 한다.

 
토끼는 약자를 괴롭히는 강자를 꾀로서 물리치는 상징

옛날에 심술궂은 호랑이가 소나무 밑을 지나다 황새가 알을 품고 있는 것을 보고 알을 빼앗아 먹으려고 했다. 그러자 토끼가 더 맛있는 고기가 있는 곳을 알려 주겠다고 억새풀이 있는 곳으로 유인했다. 호랑이는 토끼가 시키는 데로 참새 모는 소리가 들릴 때 까지 억새풀 속에 앉아 있었는데 이때 토끼가 숲에 불을 놓아 이후부터는 호랑이가 불을 무서워하게 되었다 전설이 있다.

 
▲ 민의 동요라고 할 수 있는 우리나라 대표적 동요인 '산토끼'가 있다.  작사 ․ 작곡가는 고 이일래선생이다.


 
● ‘역사속의 토끼’

<신라> 토우 · 수막새, 고려 고분 · 향로의 토끼

신라 토우에서 보이는 토끼의 모습은 특이하다. 뛰어오르는 듯 긴장한 동작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 흙으로 만든 토끼가 귀를 쫑긋 세우고 금방이라도 뛰어나갈 것만 같다. 토끼는 인도의 고대 범어(梵語)에서부터 달의 다른 이름으로 쓰였다고 하는데, 그때의 의미에는 뛰어오르는 동작도 포함 됐었다고 한다.

통일신라의 수막새에도 토끼가 나온다. 뚜껑이 닫힌 항아리를 사이에 두고 오른쪽에는 토끼가, 왼쪽에는 두꺼비가 항아리의 뚜껑을 여는 형상이다. 동그란 모양의 수막새는 그 자체가 달이다.

토끼와 두꺼비는 달을 지키는 동물이며, 항아리는 불로장생의 약 항아리로 해석된다. 김유신 장군 묘의 십이지신상에서도 토끼가 포함되어 있다. 머리는 토끼이고, 몸은 사람의 형상이다. 갑옷을 입고 오른손에 긴 방패, 왼손에는 단검을 들고 있다.

고려 고분인 수락암동 1호분의 십이지신에서도 토끼를 볼 수 있는데, 통일신라 시기의 십이지신 모습이 인신수두(人身獸頭)인 것과 달리, 사람의 관모 장식을 하고 있다. 고려청자 칠보투각향로는 세 마리 토끼가 떠받치는 구조다. 토끼 위에는 연꽃무늬가, 다시 그 위에는 둥근 달이 조형되어 있다.

 
<고구려> 벽화 속 토끼

우리 역사 기록에 토끼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고구려 6대 대조왕 25년(기원 후 77년)이다. ‘삼국사기’에 전해진다. 그해 10월 부여국에서 온 사신이 뿔 3개가 있는 흰 사슴과 꼬리가 긴 토끼를 바쳤고, 고구려 왕은 이것이 상서로운 짐승이라 해서 죄수를 풀어주는 사면령을 내렸다는 기록이 나온다.

달과 토끼의 관계가 긴밀하고 유구하다. 달을 토월(兎月)이라고도 부르는데, 달 속에 토끼가 살고 있다는 전래의 민간의식에서 유래한다. 고구려 벽화에서부터 확인된다. 고구려 벽화에는 토끼와 두꺼비, 계수나무가 한 조합으로 등장한다.

동요 작곡가 윤극영이 1924년 만든 ‘반달’이라는 노래는 우리 민족의 오랜 전통을 반영하고 있다. ‘푸는 하늘 은하수 / 하얀 쪽배엔 / 계수나무 한 나무 / 토끼 한 마리 / 돛대도 아니 달고 / 삿대도 없이 / 가기도 잘도 간다 / 서쪽 나라로’ 이것은 그냥 나온 가사가 아니다. 옛날 사람들은 달 속에 영원한 생명의 이상향이 존재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국민의 동요라고 할 수 있는 우리나라 대표적 동요인 '산토끼'가 있다.  작사 ․ 작곡가는 고 이일래선생이다. 고 이일래선생은 1903년 5월10일생으로 경남 마산시 성호동 62번지가 본적으로 되어 있으며 마산에서 태어났다.

'산토끼' 노래는 일제의 압박 속에 있는 국민의 심정을 토로한 억눌린 항일사상이 담겨있는 애국의 노래로 동심을 가득 담은 맑은 정서를 보여주고 있다.  조국을 잃은 서러운 마음을 노래에 실었다. 특히 이 동요는 우리나라가 토끼 형상이므로 민족감정을 유발시켰다는 이유로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하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이일래 선생의 산토끼 노래는 당시에 만들었던 가사와 차이가 있다. 당시의 이 선생이 작사한 노랫말은 "산토끼 토끼야 너 어디로 가나 / 깡충 깡충 뛰어서 너 어디로 가나 / 산고개 고개를 나 넘어 가아서 토실토실 밤송이 주우러 간단다"로 이것이 원본의 가사지만

훗날 부르기 쉽고 어감이 편리한 현재의 노랫말로 약간의 수정이 가해졌다. “산토끼 토끼야 / 어디를 가느냐 // 깡충 깡충 뛰면서 / 어디를 가느냐 // 산 고개 고개를 / 나 혼자 넘어서 // 토실 토실 알밤을 / 주워서 올테야”가 요즘 어린이들이 부르는 동요가사가 되었다.

이 선생은 뒤늦게 산토끼 작곡가로 알려져 제2회 한국아동음악상공로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처럼 동요에도 토끼가 등장한다. 그 만큼 토끼는 우리들과 친숙한 동물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역사와도 함께 한다

고구려 고분이 많은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 지역의 장천 1호분(5세기 후반) 벽화에 토끼가 나온다. 달에서 방아를 찧는 모습의 옥토끼가 두꺼비와 함께 표현되어 있다. 평양 지역의 덕화리 1 · 2호분, 개마총, 진파리 1 · 4호분, 내리 1호분 등에도 옥토끼가 등장한다. 이 토끼가 찧고 있는 것은 보통의 떡이 아니라 좀 더 특별한 것 같다. 고구려 벽화 속 토끼는 달의 정령으로서 불사약을 제조하는 모습으로 해석된다. 달 속 계수나무를 불사목(不死木)이라고 부른다.

계수나무의 어린 껍질과 어린 가지는 예로부터 혈액순환과 해열에 주요한 한약재로 사용됐다. 달 속 토끼가 찧는 선약의 재료가 계수나무인 셈이다. 조선 후기 한글 고소설 ‘별주부전’에서 별주부가 남해 용왕의 병을 고치기 위해 토끼의 생간을 구하려 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토끼의 간 역시 불로장생의 영약으로 믿었던 것이다.

 
<조선후기> 예술과 토끼

조선 후기 문학 · 음악 · 미술에 토끼가 자주 등장한다. 판소리 여섯 마당이나 열두 마당 가운데 하나인 ‘수궁가’, 한글 고소설인 ‘별주부전’이 대표적이다. 잡가의 하나인 ‘토끼타령’, 판소리계의 동물 우화소설인 ‘토끼전’도 빼놓을 수 없다.

조선 후기 미술 가운데 토끼 그림으로는 조영석(1686∼1761)의 ‘암하춘토(巖下春兎)’, 변상벽(1730∼?)의 ‘토끼’, 최북(1712∼1786)의 ‘추토(秋兎)’, 김득신(1754∼1822)의 ‘추계유금(秋谿遊禽)’ 등을 꼽을 수 있다. 김홍도(1745∼?)가 그린 8폭 영모 병풍에도 토끼가 등장한다.

호랑이와 토끼를 함께 그린 그림들도 주목할 만하다. 심사정(1707∼1769)의 ‘황취박토(荒鷲搏兎)’와 ‘호취박토(豪鷲搏兎)’, 최북의 ‘호취응토(豪鷲凝兎)’ 등이다. 호랑이에게 쫓기는 토끼의 모습을 그렸다. 이 같은 흐름은 조선 말기의 민화로 이어지면서 익살스러운 모습으로 변화해 간다. 호랑이에게 담뱃대를 들이대며 담배를 권하는 토끼를 묘사하기도 한다.

조선 후기의 각종 문자도(文字圖)에도 토끼가 등장한다. 대개 부끄러움을 뜻하는 ‘치(恥)’자에 매화와 함께 그려진다. ‘치’자에는 충절과 절개로 유명한 백이 · 숙제의 고사를 담고 있다고 한다. 토끼의 이미지가 확장되는 느낌이다. 이 밖에 토끼가 물고기 · 새 · 거북이 등과 이야기를 나누는 듯 한 민화도 전해진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해 보이는 민초들의 꿈을 익살과 해학으로 승화시켰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종교> 불교 속 토끼, 희생의 이미지 

불교 설화에서 토끼는 자기 희생의 상징으로 묘사돼 있다.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 제석천(帝釋天: 불교의 수호신)을 위해 스스로를 소신공양하는 토끼의 이야기가 나온다. 제석천이 노인으로 변신해 여우 · 원숭이 · 토끼에게 먹을 것을 청했을 때, 여우는 생선을, 원숭이는 과일을 가져왔으나, 빈손으로 돌아온 토끼는 불 속에 제 몸을 던져 제석천을 공양했다는 이야기다. 토끼의 소신공양에 감동한 제석천은 토끼의 형상을 달에 새겨 후세의 영원한 본이 되게 하였다고 한다.

양산 통도사, 수원 팔달사 등의 벽화에는 거북이 등에 탄 토끼 모습을 볼 수 있다. 불교에서 토끼의 이미지를 중시했음을 방증한다. 토끼가 희생 제물이 되어 병자를 고쳤다는 이야기는 민간 전설로도 전해진다.

 
▲ 불교 설화에서 토끼는 자기 희생의 상징으로 묘사돼 있다.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 제석천(帝釋天: 불교의 수호신)을 위해 스스로를 소신공양하는 토끼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솝의 우화 ‘토끼와 거북의 달리기 경주’에서 받은 교훈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에서는 토끼가 지고 만다. 토끼를 잠꾸러기나 자만심의 극치를 보여준 것이라고 폄하한다. 그러나 토끼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애초 게임이 되지 않는 거북이에게 승리를 양보한 배려는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들의 삶에서는 양보나 배려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다만 승리가 있을 뿐이다. 언제나 승자나 1등에게만 박수를 보내고 월계관을 씌워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우화를 통해 새로운 교훈을 배워야한다. 그것은 속도가 아니고 방향이다.

느리지만 옳은 방향으로 가야한다. 이같이 성실함의 전형인 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어도 한참 바뀌었다. 사람들이 성실하다고 모두가 잘살 수 없다는 것을 눈치 채기 시작했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 열 받은 토끼가 거북이에게 다시 대결을 요청한다.

첫 대결로 뼈저린 교훈을 얻은 토끼는 이번에는 죽을 힘을 다해 뛰어서 토끼가 이겼다. 세상은 속도의 시대로 바뀌었다. 남들보다 한 발 앞서 뛰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기에 `빨리빨리'가 이 시대의 교훈이 되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변명을 한다.

 

▲ 토끼는 동그란 눈과 큰 귀를 갖았다. 동그란 눈은 세상을 둥글게 긍정적으로 보라는 뜻이다. 큰 귀는 많은 소리를 제대로 들으라는 뜻이다.

 
2011년 신묘년 토끼가 주인공인 해다. 토끼는 동그란 눈과 큰 귀를 갖았다. 동그란 눈은 세상을 둥글게 긍정적으로 보라는 뜻이다. 큰 귀는 많은 소리를 제대로 들으라는 뜻이다.

삶의 지혜는 얼마나 많은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느냐에 달렸다. 그러나 소리만 잘 듣는다하여 능사는 아니다. 예부터 남의 말에 솔깃하여 줏대 없이 휘둘리는 사람들을 "귀가 얇다" 했고, 라틴 격언에도 "악인의 말에 귀를 제공하지 말라"고 했다.

 토끼의 눈과 귀가 조절력을 갖추었듯이 우리들의 눈과 귀도 세상의 숱한 풍문들을 걸러내어 올바르게 보고 올바른 소리에 제대로 귀 기울일 줄 아는 그런 신묘년 새해가 되기를 소망한다.


 
<시인 정성수 프로필>

1994년 서울신문에 시 ‘작별’을 발표하고 문단에 나옴.
한국교육신문 신춘문예 동시 ‘콧구멍 파는 재미’ 당선.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시 ‘배롱나무 꽃’ 당선.
창조문학신문 신춘문예 시 ‘되창문’ 당선.
전북일보 ‘이주일의 동시’ 감상 평 연재.
교육신보 ‘시가 있는 교단’ 시 배달 연재.
전주일보 ‘정성수가 보내는 한편의 시’ 감상 평 연재.
「시집」‘아담의 이빨자국’ 외  「동시집」‘할아버지의 발톱’ 외 「시곡집」‘인연’ 외
「동시곡집」‘동요가 꿈꾸는 세상’ 외 「산문집」‘말걸기’ 외 「실용서」‘글짓기, 논술의 바탕’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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