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②] 천도교와 3.1운동 : 종교를 초월한 독립운동

세 종단이 함께 독립운동을 추진할 수 있었던 과정은?

이현재 기자 | 기사입력 2019/02/24 [10:26]

[기고②] 천도교와 3.1운동 : 종교를 초월한 독립운동

세 종단이 함께 독립운동을 추진할 수 있었던 과정은?

이현재 기자 | 입력 : 2019/02/24 [10:26]
▲ 천도교의 독립운동에 기독교와 불교도 함께 동참했다. 

 

그날로 서울을 출발하여 2월 12일 선천에 도착한 이승훈은 사경회에 참석한 장로교 목사 양전백, 이명룡, 유여대, 김병조 등 동지를 만나 서울의 운동계획을 설명하자 일동은 모두가 이에 찬성했다. 다시 14일 평양으로 나와 왜경의 감시를 피하기 위하여 기독병원에 입원하면서 장로교 목사인 길선주와 신홍식을 만나 동의를 얻었다. 그리고 2월 17일 재차 상경하여 최남선을 만나려 하였으나 연락할 방도가 없어 고민하던 차에 기독교청년회 간사인 박희도를 만나 기독교 측에서도 독립운동에 관하여 논의가 분분하다는 말을 듣고 2월 20일 박희도의 집에서 남감리교 목사 오영화, 정춘수, 북감리교 감리사 오기선, 신홍식 등 여러 사람이 회합하여 독립운동에 관한 방략을 서로 협의한 결과 서울과 각 지방에서 동지를 규합할 것과 일본정부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할 것을 결의하였다. 당초 함태영의 집에서도 이와 별도로 이갑성, 안세환, 오상식, 현준 등이 모여 독립운동에 관한 협의를 하였으나 의견이 구구하여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다.

 

2월 21일 최남선은 소격동 이승훈의 숙소로 찾아가 그동안 왜경의 주목 때문에 상봉치 못한 이유를 말하고 같이 재동 최린의 집으로 찾아갔다. 이승훈은 그동안의 경위를 말하고 전날 박희도의 집과 함태영의 집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하고 기독교 측에서는 독자적으로 운동을 계획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자 최린은 독립운동은 민족적 대사업인 만큼 절대로 통합해야 된다고 역설하였다. 이에 대하여 최남선도 이승훈도 동의하면서 내일 기독교 측과 다시 상의하여 대답하겠다고 하면서 어제 회의에서 운동자금 조달문제가 가장 난제로 거론되었다고 하면서 천도교에서 5천원을 융통해 주면 좋겠는데 그것이 어렵다면 3천원만이라도 변통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최린은 천도교에서도 은행에 예금하였던 돈을 일전에 왜경에게 전부 압수당하여 곤란 중에 있으나 될 수 있는 대로 주선해 보겠다고 말하였다. 그날 저녁 최린은 상춘원에 가서 성사님을 뵙고 그동안의 경과를 보고하고 기독교 측에서 요구한 운동자금에 대해 말씀드리자 성사께서는 기독교 측에서 요구한 5천원을 융통해 주는 것이 좋다고 하시면서 “춘암에게 말할 터이니 돈을 받으면 곧 기독교 측에 보내시오.”라고 승낙하였다. 다음날 2월 22일 천도교 금융관장 노헌용이 5천원을 최린의 집으로 가져왔다. 최린은 즉시 이승훈이 묵고 있는 숙소로 찾아가 5천원을 직접 교부하였다. 

 

기독교 측에서는 22일 밤 이갑성의 집에서 이승훈, 박희도, 함태영 등 여러 사람이 모여 독립운동에 관한 구체적인 방법을 협의한 끝에 천도교 측의 운동방법을 정확히 탐문한 후 합동여부를 결정하기로 하고 이 교섭을 함태영, 이승훈 양인에게 일임하였다. 다음날 저녁 함태영과 이승훈이 재동 최린 댁을 방문하여 전날 기독교 측의 회의결과를 설명하고 독립선언보다는 독립청원을 하기로 의견을 모았다고 말했다. 이에 최린은 우리의 자주적 정신에 의한 독립운동이므로 독립선언이라야 옳다고 주장하자 두 사람은 이에 찬의를 표하고 동지들과 상의 후에 회답하기로 하였다. 그날 밤 이승훈, 함태영 두 사람은 함태영의 집에서 오기선, 박희도, 안세환 등 여러 사람과 숙의한 결과 천도교 측과 합동하여 독립선언 방식의 독립운동을 하기로 결정하고 함태영, 이승훈 두 사람을 기독교 측 대표로 선정하여 제반 교섭을 일임하였다. 2월 24일 이들 두 사람이 최린 댁을 방문, 기독교 대표자격으로 천도교와 합동하여 독립선언 방식의 독립운동을 하기로 발표하였다. 이로써 천도교 측과 기독교 측의 합동이 공식으로 성립되었다. 최린은 의암성사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의암성사는 양대 종교단체의 합류는 이번 민족운동이 성공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한 것이라 하여 매우 기뻐하였다.

 

2월 22일에 1월 5일부터 시작한 49일 기도회가 끝난 후 보고 차 상경한 교구장들과 우이동 봉황각 기도회에 참석했던 중앙총부 간부들에게 의암성사는 말하기를 “우리가 만세를 부른다고 당장 독립이 되는 것은 아니요. 그러나 겨레의 가슴에 독립정신을 일깨워 주어야 하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꼭 만세를 불러야 하겠소.”라고 했다. 그리고 이번 거사에는 기독교, 불교와 힘을 합쳐야 한다고 하시면서 운동의 성격과 운동추진에 따른 제반 사항 등을 설명하고 추후 독립선언서의 발송 등 구체적인 지시가 내려갈 것이니 각 교구에 내려가 준비에 착수하도록 지시하였다. 

 

당시는 일제가 종교 이외의 단체는 모조리 해산시켰기 때문에 일반 사회단체를 포섭할 수 없었다. 그리고 종교단체 중에서 불교와 유교의 참가 없이는 일원화된 통일체라고 말할 수 없었기 때문에 2월 24일 밤 최린은 평소부터 친교가 있었던 신흥사 승려인 한용운을 계동 자택으로 찾아가 그동안의 경과를 밝혔더니 즉석에서 불교 측 동지들과 협의하여 공동으로 참가할 것을 승낙하였다. 한용운도 기독교 측과의 연합을 대단히 기뻐하였으나 유림측의 참여가 없음을 못내 섭섭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 후 한용운은 불교 측 동지들과 규합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시기가 급박하고 일경의 감시가 심해 한용운, 백용성 두 사람만 민족대표로 참가하기로 하였다. 다만 유교 측을 참여시키지 못한 것이 유감이었다. 유교 측은 원래 조직체계가 분명치 못하고 개인적으로는 상당한 인물이 없지 아니하였으나 왜경의 경계가 삼엄하고 더 이상 조직을 확대하다가는 계획이 누설되면 대사를 그르칠 염려가 있어서 세 교단이 주체가 되어 독립운동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이상이 세 종단이 함께 독립운동을 추진할 수 있었던 과정이다.

 

기고자/천도교 교화관장 김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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