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방서 만난 도끼 살인범 고재봉

뉴민주.com | 기사입력 2008/12/14 [16:16]

감방서 만난 도끼 살인범 고재봉

뉴민주.com | 입력 : 2008/12/14 [16:16]
  처음 양키물건 배달책을 할 때 몇 개월만 해서 한밑천 잡자는 생각이었지만 한 번 빠져들자 쉽게 발을 뺄 수가 없었다. 한 번만 더, 한 번만 더, 하다보니 결국 꼬리가 길어져 버렸다. 결국은 붙들려 감방신세를 지고 말았다.

  태국군 녀석 때문에 일이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운천에는 곰보 아줌마와 쌍벽을 이루는 양키물건 장수가 또 한 명 있었다. ‘김중사 부인’이라고 불리우는 여자였다. 그 여자가 한 태국군인으로부터 꽤 많은 물건을 샀는데 다음 날 그 태국군인이 갑자기 돈을 돌려주며 거래를 취소해버렸다. 이유는 간단했다. 돈 때문이었다. 그 태국군인이 김중사 부인에게 판 물건을 값이나 알아보잡시고 곰보 아줌마에게 다시 값을 물어보았는데 곰보 아줌마가 쳐주는 값이 훨씬 후했던 것이었다. 원래 곰보 아줌마는 값을 잘 쳐주고 운반비도 후하게 주는 편이었다. 내가 그 여자와 친하게 지낸 것도 그 때문이었다. 주판알을 다시 튕겨본 그 태국군인의 마음이 변한 것은 당연했다. 그는 김중사 부인에게 물건을 이미 팔았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고 다시 곰보 아줌마에게 물건을 판 후 돈을 받아 김중사 부인에게서 받은 돈을 돌려줘버렸다. 양키물건 장사는 항상 위험부담이 있었기 때문에 그 바닥 사람들은 의리를 매우 중요시했다. 당국에 붙잡혀도 거래처를 끝까지 숨겨주었고, 경쟁자의 비밀을 팔아먹지 않았으며, 일단 팔린 물건을 빼돌리는 것은 절대 금기였다.  

  자신에게 물건을 팔았던 태국군인이 마음이 변한 것을 알자 김중사 부인은 분통이 터졌다. 그리고는 누가 값을 더 쳐준다고 꼬드겨서 일이 그렇게 된 것이라고 믿었다. 그 여자는 한국군 제1사단 헌병중대 선임하사인 남편에게 그 일을 털어놓았다.

  “이 바닥에서 이럴 수가 없잖아요. 어떤 연놈이 그 물건을 가로챘는지 당신이 좀 알아봐주세요.”

  평소 아내의 일에 관여를 하지 않던 김중사도 흥분한 모양이었다. 누가 그런 야비한 짓을 했는지 물건을 빼낼 때 확인해보자며 새벽부터 부대 앞에 매복을 하고 기다렸다.

  그런 사실을 알 리 없는 나는 밤 두 시쯤 물건을 싣고 기다렸다가 통행금지가 해제된 후인 새벽 다섯 시경 부대를 나왔는데 얼마 가지 않아 헌병 차가 따라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겁을 먹지는 않았다. 한국군 지프가 미군 트럭을 따라올 리 만무했다. 나는 액셀레이터를 밟아 그 차를 따돌렸다.

  “짜식들, 니네들이 죽었다 깨어나도 날 잡을 수 있을 것 같으냐, 어림 없다, 어림 없어.”
  나는 승리감에 도취돼 계속 차를 몰았다. 그런데 운천과 포천 사이 중량교 검문소에 도착했을 때였다. 무사통과하리라고 생각했었는데 갑자기 헌병이 길을 막고 차를 세우는 것이었다. 아마 나를 놓친 헌병이 연락을 해놓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한국군 헌병의 검문에 응하지 않으면 그뿐이었다. 나는 거기서 방향을 왼편으로 돌려 사잇길로 빠져 달렸다. 그러나 더 큰 일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포천을 지나 신바람나게 달려서 드디어 의정부에 도착했을 때였다. 의정부 삼거리 검문소에서  아예 바리케이드까지 쳐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거긴 옆으로 빠질 길도 없었고 미군 헌병까지 나와서 차를 검문하고 있었다. 오갈 데 없이 걸렸다는 것을 직감했다. 독안에 든 쥐 꼴이었다.  내가 운전대를 잡고 앉아 전전긍긍하고 있노라니 미군 헌병이 다가와서 신분증을 보자고 했다. 나는 영어를 못알아 듣는 시늉을 했다. 태국군과 같이 다닐 때 태국군들이 불리하면 영어를 못 알아듣는 시늉을 하면서 위기를 넘기는 경우를 많이 보았기 때문에 그 방법을 써먹기로 했던 것이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한국군 헌병이 다가 오더니 히죽 웃으며 말했다.

   “이거 봐. 쇼 좀 그만해. 다 알고 왔으니까 쓸 데 없는 쇼 부리지 말고 고분고분 말 들어.”
  하지만 순순히 끌려갈 수는 없었다. 끝까지 버티기로 하고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러자 미군 헌병이 화가 나는지 권총을 빼드는 것이 아닌가. 미군 헌병은 인상을 쓰며 차에서 내리라고 총 끝으로 지시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차에서 내렸다. 미군헌병은 내 손을 뒤로 돌려 수갑을 채우고 헌병 차에 태웠다. 내가 타고 온 차는 다른 헌병이 운전을 해서 앞장을 서고 나를 태운 차가 그 뒤를 따라 의정부의 미1군단 헌병대를 거쳐 제19범죄 수사대 사무실로 끌려갔다.

  거기서 조사를 받은 후 영창에 들어가 있자 얼마 후 태국군 병기장교가 소환되어 왔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차를 빌려주었을 뿐 그 차에 뭘 싣고 어디로 가는 지야 내가 알 게 무어냐”는 식으로 잡아떼고 있었다. 오히려 차를 어떻게 했느냐고 따지고 들었다.  하긴 그를 법에 따라 소속 태국군 부대에 이첩해보아야 모두 한통속으로 “외화벌이 하다가 고생을 했다”는 위로나 받으면서 사건을 마무리할 가능성이 더 컸다.  
 
  감방속에서 앉아 있노라니 후회가 막급이었다. 차라리 순순히 검문에 응했더라면 물건을 빼앗길 망정 숨길 건 숨길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굴뚝 같았다. 공연히 진짜 태국군 흉내를 내며 버티다가 범죄 수사대까지 끌려오는 바람에 거래선 이름이 적힌 수첩과 무려 오백만원이나 들어 있는 예금통장까지 압수당하고 만 것이었다. 당시 오백만 원이면 제법 큰돈이었다.

  제19범죄수사대에서는 취조를 적당히 하고 자신들의 수사를 끝내버렸다. 내가 순순히 응하지 않자 귀찮았던지 피아노, 에어컨, 비디오 등 시가 천만원 규모의 외제물건을 배경으로 나를 세워놓고 사진을 찍은 후 압수된 물건과 함께 사건을 서울세관으로 인계했다.

  세관 감시과에서 지저분하게 취조를 했다. 지금의 서울 서부역 뒤 만리동에 있던 서울 세관에서는 감시과 직원 두명이 나의 취조를 맡았다. 그들은 나에게 누구누구에게 물건을 넘길 것이었느냐고 다그치다가 내가 입을 열지 않으니까 수첩을 들이대며 좋은 말 할 때 불라고 했다. 그래도 내가 입을 열지 않자 욕조에 물을 채우고 머리를 틀어박는 등 고문까지 했다. 하지만 나는 끝까지 수첩에 적힌 사람들은 양키 물건과 상관이 없다고 잡아떼며 불지 않았다. 나의 신원에 대해서도 이북에서 6.25 때 남하했기 때문에 친척이나 아는 사람도 없다고 말했다.

  “이 쌔끼가 아직 맛을 덜 봤구만. 수첩에 다 적혀 있는데 모른다고 오리발이야? 너 비행기도 한 번 타 볼래?”

  험악하게 생긴 직원 하나가 겁을 잔뜩 줬다. 세관 감시과 직원들은 밀수꾼들을 체포하고 취조하는 게 직업이어서 그런지 행동이 거칠고 입이 걸었다. 하지만 나는 굴복하지 않고 끝내 모른다고 잡아뗐다. 물건을 싣고 가다가 잡혔는데도 모른다고 잡아떼자 그들은 어이가 없는 모양이었다. 나를 윽박지르다가도 너털웃음을 터뜨리곤 했다.

  “이 새끼, 이거 웃기는구만. 빨가벗고 박다가 들켜도 안했다고 우길 놈이야.”

  내가 생각해도 잡아떼는 것이 말도 안된다고 여겨졌지만 나는 또 다른 속셈이 있었다. 불지 않고 적당히 버티다가 박중사에게 구조 신호를 보내자는 생각이었다. 박중사는 태흥공업사 시절 목공소 앞의 가게에서 만난 사람이었다. 나는 그때 언몸을 녹이려고 가게에 자주 건너가 난로불을 쬐곤 했었는데 박중사는 그 가에의 단골이었고, 그 인연으로 나와 친해지게 되었었다.

  나는 일단 버티는데 성공했다. 밀고 당기는 말싸움 취조를 당하다 보니 어느덧 밤이 되었다. 그러자 감시과 직원들은 나를 서울 세관 3층에 있는 사무실에 옮기면서 직원 한 명이 붙여 나를 감시하게 했다.

  “에이, 씨펄, 재수에 옴 붙었네. 하필이면 오늘 내가 걸릴 게 뭐야. 야 이 새끼야, 너때문에 중요한 약속이 있는데 못 가잖아.”

  감시를 맡은 세관원은 줄곧 그렇게 투덜거렸다. 때는 이때다 싶어 그에게 말을 붙였다. 

  “죄송합니다. 기왕 일이 이렇게 되었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저 도망갈 사람 아니니까 가실 데 있으면 걱정 마시고 다녀오세요.”

  “너 같은 새끼를 어떻게 믿냐? 튀는 놈이 튄다고 말하고 나서 튀는 것 봤냐 임마?”
  그는 수년 전에도 조사 받던 피의자가 창문으로 투신한 적이 있다면서 눈을 흘겼다. 그러나 표정이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내가 죽긴 왜 죽습니까, 그딴 일로 염려 말고 다녀 오시라니까요.”

  나는 다시 한 번 권했다. 사실 도망갈 생각은 없었다. 인적사항이 다 조사되어 있는데 도망가보아야 헛일이었다.

  “좋아. 그러면 나 좀 다녀올 테니까 너 좀 불편하더라도 여기다 수갑을 채워 놓아야 겠어. 잠자코 누워서 나 올 때까지 자빠져 잠이나 자라구.”

  그는 책상 옆에 간이 침대를 펴더니 나를 눕게 하고 책상 다리에다가 내 손목 하나를 갖다대고 수갑을 채웠다. 그가 나가자 나는 사무실 안을 둘러보았다. 우선 전화기 부터 찾았다. 전화만 걸리면 바깥으로 연락이 된다고 생각하니 체증이 뚫리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수갑이 책상다리에 채워져 있어서 전화기까지 손이 닿지 않았다. 전화기를 눈 앞에 두고도 전화를 걸 수 없었다. 나는 속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포기할 수는 없었다. 요모조모 궁리를 하다가 간이침대에 눈길이 쏠렸다. 침대목을 빼면 전화기를 끌어올 수 있을 것 같았다. 한쪽 손이 묶여 있어서 여의치 않았지만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손발을 다 동원하여 침대목을 빼냈다. 그걸로 책상 끝에 놓여 있는 전화기를 끌어당기는데 성공했다. 우선 곰보 아줌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줌마, 너무 걱정할 거 없어요. 아무도 불지 않았으니까. 앞으로도 죽으면 죽었지 입을 열지 않을 거니까 사람들한테 연락해서 절대로 물건을 산 적이 없다고 무조건 시침을 떼라고 하세요.”

  그녀를 안심시킨 나는 박중사에게도 빨리 연락을 취해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박중사에게 먼저 전화를 하지 않고 곰보 아줌마에게 전화를 한 것은 혹시 곰보 아줌마가 화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의리에서였다. 그리고 곰보 아줌마는 경험이 많았으므로 이런 경우 무슨 수를 쓸 것만 같았다. 곰보 아줌마는 천만원어치의 물건이 날아갔는데도 내가 의리를 지켜줄 것 같은 느낌이 들자 되레 고맙다는 말을 몇 번이나 했다. 자신이 체포되면 압수 당한 물건이 문제가 아니라 시세 만큼 벌금을 더 물어야 할 판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내가 어디에 갇혀 있는지 일단 바깥으로 알리고 나자 긴장이 풀렸다. 마음이 다소 가라앉으면서 몸이 축 늘어지는 느낌이었다. 또 하루 종일 심문을 받느라 피곤했던지 잠이 몰려왔다.

  다음날 아침 일찍 눈을 뜨자 바깥이 시끌벅적했다. 박중사가 날 새기를 기다렸다가 부리나케 뛰어 온 모양이었다. 당시는 계엄하였기 때문에 수도경비사 같은 소위 끗발 좋은 군부대의 서슬이 세관 심사과 수사관쯤은 좌지우지 하고 있었다.

  “당신 말이야, 그런 분이 뒤에 있으면 그렇다고 말을 해야지. 우린 그것도 모르고 벌써 구속 영장을 신청해버렸잖아. 나, 참.”

세관원의 태도가 전날과는 딴 판이었다. “이 새끼” 대신 “당신”으로 호칭이 바뀌었고, 말씨도 부드러웠다. 그리고 구속하지 않아야할 사람을 구속하기나 한 것처럼 혀를 끌끌 차면서 안타까와했다. 속으로 쓴 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했잖소. 6.25때 단신 월남했다며 말이야.”
  하지만 이미 구속 영장이 떨어진 뒤여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서대문 형무소로 수감되고 말았다.  박중사는 일단 들어가 있으면 자기가 손을 써 보겠다면서 나를 달랬다. 대신 잡범들과 함께 수감되면 혹독한 신고식을 치룰 가능성이 있으니까 중범자 감방에 넣어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중범자 감방에 들어가서 사실대로 죄목을 대지 말고 살인죄 정도로 적당히 둘러대라고 일러주었다.

  내가 수감된 감방은 3사상11호로 2층 건물의 위층이었다. 넓이는 서너 평 정도 넓이였고, 감방안에 들어서자 세 사람이 앉아 있었다. 한 명은 북한에서 내려온 간첩이라고 했고, 다른 한 명은 당시 반혁명 사건으로 체포된 무기수였는데, 마지막 한 명은 감방 안에서도 수갑을 찬 채로 앉아 있어서 무슨 죄를 지었는지 매우 궁금했다. 그는 자신에 대해 아무 것도 밝히지 않았다.

  박중사가 중범자들과 함께 수감되면 신고식을 안해도 된다고 귀뜸을 해주긴 했지만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세 명밖에 없었고 또 중범들 답게 거물들이어서 그런지 심한 고생은 시키지 않았다.

  우선 무슨 죄로 들어왔느냐 물었다.
  “한놈 박살을 냈죠.”
  “이십 바퀴(20년 징역)는 돌겠구만.”

   그들은 자신들이 판사라도 되는 듯이 선고형량을 때렸다. 그리고는 바지를 내리고 물건을 꺼내서 벽에다 내 이름을 써보라고 했다. 나는 겁도 났지만 한편으론 우습다 싶어 그들이 시키는 대로 성기를 꺼내 이름을 쓰는 시늉을 했다. 그들이 웃음을 터뜨리자 나도 저절로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신고식 치고는 재미있는 신고식이었다.
  며칠 후 공판일이 되자 아침에 간수가 감방문에서 내 이름과 수인번호를 불렀다.

   “148번, 강신목”
   내가 발딱 일어서자 간수는 문을 열고 들어와 하얀 오랏줄로 내 손을 뒤로 돌려 묶었다. 내가 깜짝 놀란 것은 그 다음 순간이었다. 간수가 또 한사람의 수인번호와 이름을 불렀다.
  “수인번호 XXX 고재봉.”

  고재봉. 수갑을 차고 있던 그 사람. 고재봉이 나와 한방에서 지냈단 말인가. 강원도에서 중대장 일가족을 도끼로 몰살시킨 희대의 살인마 고재봉이 나와 함께 지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내 뒤에 같은 포승줄로 나란히 묶여서 같은 날 공판을 받으러 가게된 인연이 기이하게만 느껴졌다. 고재봉은 내가 놀라는 모습을 보고 한마디 툭 던졌다.

  “왜, 내가 고재봉인지 몰랐구만. 놀랐소?”

  약간 쇳소리가 섞여 있었지만 살인마답지 않게 부드러운 말투였다.

  고재봉과 나는 나란히 묶여서 호송차에 올랐다. 호송차는 당시 정동에 있던 법원으로 향하지 않고 남산으로 갔다. 재판은 수도경비 사령부 안에서 열렸다. 고재봉은 군인신분이었으므로 계엄이 아니라도 군법회의에서 재판을 받아야 했겠지만 나는 민간인 신분이었기에 군법회의에 회부될 사안은 아니었다. 박중사가 손을 써서 군인 사칭에 군대 차량이 개입되었다는 등의 이유를 붙여 관할권을 군법회의로 돌린 모양이었으나 박중사는 후에 만났을 때 그런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박중사를 비록 객지의 구멍가게에서 만나 사귀었지만 그와 나는 서로 어려울 때 도와주는 친형제 이상의 관계를 유지해왔기 때문에 누가 누구를 위해서 무슨 일을 했다는 식의 자랑을 한 적이 없었다.

  드디어 재판관 앞에 서서 재판이 시작되었지만 방청객은 아무도 없었다. 감초격으로 끼어드는 구경꾼들이나 기자들도 옆 방에서 열리고 있는 고재봉의 재판으로 몰려갔는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재판장은 나에게 몇 가지 인정신문을 하더니 법무관과 뭐라고 수군거리다가 일어나서 나가버렸다. 서기로 보이는 상사가 내게로 오더니 따라오라고 고개 짓을 하며 서류를 한 보따리 들고 앞서 갔다. 나는 영문도 모르고 그를 따라갔다. 그는 밖으로 나가 나를 뒷쪽의 휴지 소각장으로 데려갔다.

  “이 서류들을 주욱 한 번 훑어보시오. 당신 체포될 때부터 조서 쓴 것들이니까 빠진 게 있나 잘 보라고.”

  나는 대강 들추어보았지만 너무 분량이 많았다. 일일이 확인할 수가 없었다.
  “맞습니다.”
  “맞으면 거기서 다 소각처분하고 들어오시오. 그리고 돌아가서 기다리면 오늘밤에 석방될 거요. 빵간에 있는 치들한테는 그런 말 할 거 없고. 그냥 한 열바퀴 구형 받았다고 하쇼. 눈치채면 해로우니까. 빽 썼다고 골탕 실컷 먹이고 돈 좀 내놓으라고 할 거요.”

  과연 그 날밤, 법정 상사의 말대로 통행금지 시간을 얼마 앞두고 나는 2주일간 묵었던 서대문 형무소의 육중한 문을 나설 수 있었다. 그때의 기분이 묘했다.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제대후 지나간 일년 남짓한 기간이 한낱 꿈처럼 생각되기도 하고 돌아보는 서대문 형무소의 모습이 신기루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현실임에는 틀림 없었다.
 
 
형제 목공소의 탄생
 
  당시 양키 물건 장수는 한 번 당국에 적발되어 된통 당하고나면 나면 회복하기가 어려웠다. 그 동안 투자한 돈이나 번 돈은 몽땅 다 날아가 버리고 새로 밑천을 마련해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았다. 위험부담이 많아 아무나 선뜻 돈을 빌려주거나 동업을 하려 들지 않았다. 나도 한 번 당하고 나자 다시 양키물건 장사를 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러나 미군부대 언저리를 떠날 수 없었다. 그곳에선 왠지 돈냄새가 나는 것 같았고, 나와 무슨 인연이 있는 듯이 여겨졌다.

  양키물건 장사에서 손을 뗀 나는 그 후 남한산성 인근에 미군 미사일 부대가 들어온다는 소문을 듣고 그곳으로 옮겨가서 목공소를 차렸다. 미군 부대가 새로 들어오면 부대를 상대로 먹고사는 인구가 몰리기 시작할 것이고 그들이 살 집을 짓는 공사는 물론이거니와 다방, 술집 등 유흥업소에서부터 세탁소, 옷가게, 잡화점 등 사업체도 우후죽순처럼 생겨날 것이기 때문에 목수 일감도 자연 많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 차린 목공소가 <형제 목공소>의 시초가 되었다.

  목공소를 개업하자 예상했던 대로 부대 정문 건너편을 중심으로 순식간에 대충대충 지은 건물들이 늘어서 하나의 작은 부락을 형성하면서 일감이 늘기 시작했다. 집이 하나씩 늘어갈 때마다 목공소에 일거리가 밀려들었다.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바빴다. 

  동네 모습이 하루가 다르게 변해갔다. 사람들은 미군을 상대로 한 클럽이나 기념품 가게, 혹은 앞쪽에 구멍가게처럼 차려놓고 뒤에서는 외제 물건을 취급하기도 했고, 군속들을 상대로 하는 식당, 술집이 즐비하게 들어섰다. 양색시들을 위한 벌집이 여기저기 들어선 것은 물론이었다. 벌집은 기존 주택을 칸칸이 막아 조그만 방을 많이 만든다든지 아니면 창고 같은 것을 개조하여 두평 남짓한 방들을 열대여섯개씩 만드는 식으로 들어섰다. 대개 벌집은 가게들이 늘어서 있는 길가에서 한 줄은 뒤로 물러서서 자리를 잡았다.

  운천의 곰보 아줌마도 내가 체포될 때 엄청난 액수의 물건을 몽땅 날려보내고 나서 양키 물건장사에 정나미가 떨어졌는지 운천을 떠나 내가 자리잡은 동네로 옮겨왔다. 그러나 곰보 아줌마는 이제 미군이나 외국군만 봐도 진저리가 치는지 새로 터를 잡은 하삼공리에서는 아예 한국군을 상대로 하는 식당을 운영했다. 한국군은 훨씬 전부터 인근에 터를 잡고 있었지만 물자가 흔한 미군부대와 달리 가난한 냄새가 풍겼기 때문에 부대 주변에는 상가가 형성되는 경우가 별로 없었다. 하지만 곰보 아줌마가 차린 식당에는 한국군인들이 그럭저럭 모여들었다. 한국군보다도 미군부대 근무 한국인 군속들이 자주 찾는 것 같았다. 

  어느 정도 가게들이 들어서자 일감이 주는 듯 했으나 또 다른 일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새로 전입오는 미군들의 사물함등 미군들로 부터 오는 일감도 쏠쏠했다. 나중엔 명색이 목공소였지 미군들에게 사물함을 짜주는 일이 주업무가 되고 말았다. 미군 사물함은 한국군 관물함과 달라 그 속에 별의 별 것들을 다 넣어두기 때문에 크기도 제법 커서  사물함이라기 보다는  ‘가구’라는 표현이 더 정확할런지도 몰랐다. 미군들은 거기에 개인 사물은 물론 돈도 보관해두면서 군대생활에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분신처럼 여겼기 때문에 비싸게 불러도 불평을 하거나 깎지 않았다. 그 사물함에 애인이나 영화배우의 비키니 사진을 붙여두기도 하는등 사물함에 대해 애착심을 갖고 있었다. 

  나는 미군들의 사물함을 짜주면서 합리적인 생활을 나름대로 배우기도 했다. 그들은 얼마를 내라고 요구하면 군소리 없이 돈을 내지만 만약 약속했던 대로 물건을 만들어내지 못하면 자신이 만족할 때까지 계속 고쳐달라고 주문을 했다. 말하자면 줄 건 주고 받을 건 받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런 생각을 그들로 부터 일찍 배웠기 때문에 나의 인생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조금은 수월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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