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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9단의 김대중 전대통령을 회상하며!
김영삼 정부시절 정치9단에서 경제9단으로 탈바꿈을 시도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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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지도력부재인 현실, 그래도 정치9단이였던 김대중전대통령이 생각나는 것은 무슨일인가?  야당의 카리마스적인 리더로 평생의 길을 걸어오다 결국 인생의 황혼기에 정권을 잡고 마지막 정치역량을 쏟아부었던 김대중 전대통령도 재임 기간동안 많응 실정을 하게되면서 자기가 평생 꿈꾸어왔던 이상적인정치가 허상이였음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는 재임기간동안 크고작은 많은 업적을 남겼었다.   

DJ를 평생 괴롭힌 것은 색깔론이다. 좀 더 원색적으로 표현하면 ‘빨갱이’라는 단어다. DJ가 진보성향인 건 분명하다. 하지만 DJ는 사실 친미(親美)에 가까웠다. 일본에서 납치당했을 때도 그랬고, 1980년 ‘서울의 봄’ 때 내란죄로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도 그렇고, 미국은 DJ의 생명을 여러 번 구해줬다. 누군들 그게 고맙지 않겠나. 게다가 현실 정치인인 DJ는 미국의 영향력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미국 대사들이 부임하면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 애썼다. 기회가 닿을 때마다 미국에 가 백악관과 국무부, 미 의회 인사들과 인맥을 형성했다. 그런데도 선거 때만 되면 ‘DJ는 빨갱이’라는 얘기가 나왔다. 제15대 대선이 치러진 1997년에도 마찬가지였다. 한데 좀 더 빨리 터졌고 그게 오히려 다행이었다.

노동법 파문과 한보철강 부도 쇼크로 청와대와 신한국당이 만신창이가 되어가던 2월 12일, 북한노동당 국제담당 비서 황장엽(당시 74세)씨가 중국 베이징 한국 총영사관에 망명을 신청했다. 주체사상의 이론적 근거를 세운 북한 최고위 핵심 실세였다. 대한민국으로선 낭보였다. 하지만 DJ와 국민회의 입장에선 걱정이었다. 여권이 이걸 정치적으로 이용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13일 오전, 일산 자택에서 DJ가 말했다. “황장엽 사건이 왜 지금 시점에서 나온 것인지, 여러 가지 의혹이 있어요. 김영삼 대통령이 한보 사태를 물타기하고 새로운 공안정국을 조성해서 안기부법 날치기 통과 문제를 합리화하고 대선에서 북풍으로 몰아갈 생각이 아닌지 잘 들여다봐야 해요.” DJ의 우려는 곧바로 현실이 되는 것 같았다. 바로 다음 날 신한국당 김철 대변인이 논평을 냈다. “남한 권력 내 깊숙한 곳에 북한 사람이 많이 박혀 있다. 간첩이 아니더라도 우리 사회에 4만 명의 친북세력이 있다.” 집권당 대변인이 구체적인 숫자까지 들어가며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어차피 장마(선거)철이니 피할 수 없는 비였다. 대책을 세워야 했다. 15일 아침, ‘황장엽 사건 대응전략 보고서’를 DJ에게 제출했다. “황장엽의 입에 따라 총재님에게 불리한 정치환경이 조성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YS(김영삼 대통령)가 이걸 악용해 대선카드로 쓰지 못하게 선제 공격을 해서 공안분위기를 사전에 차단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선 북풍전을 미리 수행하면서 어차피 제기될 빨갱이 논쟁을 낡은 이슈로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총재님이 전면에 나서면 안 되고 당에서 대신 나서야 할 것 같습니다.”

2월 18일, DJ가 국민회의 박지원 기조실장을 일산으로 불렀다. 국민회의의 대응 지침을 주기 위해서였다. 동교동 측근들에겐 불문율이 하나 있었다. DJ가 지침을 주면 그 내용을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그대로 발표해야 한다는 것이다. 뭘 좀 안답시고 살을 붙이거나 말을 줄였다간 나중에 혼쭐났다. DJ는 언어의 파괴력을 잘 알았다. 어떤 단어를 쓰면 여론이 어떻게 반응할지, 그런 것까지 고심하며 발표문을 만들었다. 그러니 첨삭하면 안 됐다.

“받아 적으라고.” DJ가 수첩을 들고 기다리던 박지원 실장에게 말했다. “지금 국민들은 안보 문제로 매우 불안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국민을 불안하게 한 책임을 현 정부가 져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에요. 당에서 공격적인 논평이 나와야 해요. 김영삼 정부의 안보정책은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간첩이 수만 명이나 활동한다고 하고, 청와대 회의록이 북한에 유출됐다는 얘기가 나오고, 이한영씨 피격사건에서 확인됐듯이 치안능력이 엉망이에요. 혹시 김영삼 정부가 (중국에 있는) 황장엽 비서의 입국일정을 숨기거나 대선 스케줄에 맞추려는 게 아닌지에 대해 의구심을 제기하고 이 문제에 대한 여론을 만드세요.” DJ의 지시에 따라 그날부터 국민회의에선 공격적인 논평이 쏟아져 나왔다.

주로 정동영 대변인이 냈다. “간첩이 수만 명이면 막대한 국가예산을 쓰는 안기부는 존재 이유가 없다. 청와대 회의록이 즉각 김정일 책상 위에 올라간다는데 사실인지 밝혀라” “경찰력 강화 예산은 어디로 갔기에 이한영이 피격됐는가.”

이런 대응은 과거와는 사뭇 달랐다. 그동안에는 색깔론이 나오면 해명성 논평을 내면서 부인하는 데 급급했기 때문이다. 여권이 공격을 멈출 리 만무했다. 2월 25일 국회 대정부 질문 때 신한국당 허대범 의원이 총대를 멨다. “6·25 당시 DJ는 공산당원 450명과 함께 체포돼 총살당할 뻔했는데 미 해군정보부에 있던 고향친구 김진하의 도움으로 살아났다.” 본회의장은 시끄러웠다. 국민회의는 원고 삭제를 요구하며 국회에 불참하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그런데 정작 DJ가 제동을 걸었다. “국회를 공전시키면 여권의 전략에 말려드는 것이다. 오후에라도 개원해야 한다.” 그러면서 의원들에게는 자신감을 심어줬다. “내 막내동생과 두 아들이 모두 국군 장교 출신이다. 사상이 의심스러운 사람의 가족이 어떻게 대한민국 장교가 될 수 있었겠느냐. 나와 함께 인민군에 체포됐다 함께 탈출한 친구가 지금도 목포에 살고 있다. 모두 엉터리 주장이다.”

황장엽 비서의 망명으로 조성되려던 색깔논쟁은 얼마 안 돼 시들해졌다. 경제상황이 계속 악화되고 있었고, 무엇보다 너무 오랫동안 비슷한 레퍼토리가 반복돼 이념공세의 ‘약발’이 안 먹힌 것이다. DJ로선 전화위복이었다. 대선을 앞두고 예방 백신을 맞은 셈이기 때문이다.

‘황장엽 지뢰밭’을 벗어난 DJ는 당초의 전략대로 몰고 갔다. 경제를 앞세우면서 보수적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다. 3월 26일, DJ는 각 언론사 경제부장들을 신문로에 있는 한정식 집 ‘향원’에 초청했다. 어떻게 하면 현재의 경제위기를 타개할 수 있을지, 의견을 듣기 위해서였다. 야당 총재가 정치부장이 아닌 경제부장들을 불러모은 건 아마도 그게 처음일 것이다. 하루 뒤인 27일에는 21세기 시민경제 이야기라는 책을 출간했다. “지금의 경제위기는 경험과 철학이 부족한 정치인들이 경제를 주도해 예고된 것이었다. 극복방안은 정치 민주화와 시장경제 원리에 있다. 내가 집권하면 물가는 3% 이내, 금리는 7~8%로 안정시키고, 종합주가지수는 1500선이 되게 하겠다.” 그런 내용이었다.

내친김에 한 걸음 더 나아갔다. 3월 28일에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했는데 아예 ‘경제 기자회견’이라고 이름 붙였다. 이날 회견에서는 “이게 정말 DJ가 맞느냐”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깜짝 놀랄 내용이 적지 않았다. 우선 DJ는 정쟁 중단을 선언했다. 그는 “앞으로 정치문제는 대여 정치공세 자체를 중단하겠다. 그리고 국가경제를 살리는 데 만전을 기하겠다”고 말했다. 또 “최저 생계비는 보장돼야 하지만 노동자들도 임금인상 요구를 자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라가 어려우니 시도 때도 없이 올리라고 주장하지 말고 생산성이 향상된 만큼 월급을 받아야 경제가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봐도 야당보다는 집권당 대표의 입에서 나올 만한 얘기였다. 또 3당 정책위 의장과 경제부총리가 참여해 ‘경제위기 공동대책위’를 설치하자고 제안했다.

이날 DJ가 제시한 경제위기 극복 대책 여덟 가지는 다음과 같다. ▶정부 예산규모 삭감 ▶물가인상 억제 ▶부가가치세율 10%에서 8%로 인하 ▶중소기업 자금지원 강화 ▶수입 50억 달러 감축 ▶각 가정 월수입 5% 저축운동 ▶금융개혁 단행 ▶임금인상 억제 및 노사협력 확대. 수입을 줄이고 저축운동을 하자는 주장은 마치 일제시대의 국채보상운동 같은 느낌을 줄 정도다. DJ의 기자회견에 대한 여론의 반응은 좋았다. 중앙일보 3월 29일자 사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모처럼의 건설적인 기자회견이었다. 정부·여당을 깎아내리고 흔들기에만 열심이었던 과거의 회견들과는 대조적이었다. 국민회의 김대중(金大中) 총재는 정부를 격려하기 위해 회견을 한다고 했다. 또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이 잘 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말까지도 했다. 그는 경제를 살리기 위해 여야 간의 초당적 협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후략)”

재야 투사, 혹은 야당 총재에 머물 생각이라면 모르겠다. 하지만 대통령이 되겠다면 반대만이 아닌 대안을 제시해야 하고, 포용과 신뢰도 필요하다는 걸 DJ는 절감하고 있었다. “어, DJ가 저런 면이 있네?” 하는 반응이 나오면 되는데, 경제 기자회견 이후 나온 사설과 반응을 보면 충분히 성공적이었다.

국내 문제에서만 보수화 전략을 쓴 게 아니었다. DJ는 4월 5일부터 8박9일 동안 미국을 방문했다. “우리가 집권해도 대북협력체제를 포함해 한·미 관계가 더욱 긴밀해질 것이란 점을 인식시키기 위해 간다”고 말했다. 미 국방대학원에서 ‘한·미 공조체제와 동북아 안보’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DJ가 말했다. “주한미군은 한반도에서 영구적인 평화가 확보될 때까지 북한의 남침을 억제하기 위해서 필요하며 북한의 위협이 사라진 후에도 동북아 평화유지를 위해 존속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DJ가 이런 행보를 보이자 보수 언론들도 꼬투리를 잡지 못했다. 오랫동안 공식처럼 통용되던 ‘DJ=과격하다’는 이미지도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었다. 4월 24일, DJ는 ‘국민회의 대통령 후보 선출 및 총재경선 후보’로 등록했다. 정대철 의원과 김상현 의원도 경쟁자로 등록했었다. 물론 정·김 의원이 DJ를 꺾을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  한국언론사협회 공동회장겸 연합취재본부장 이창열




기사입력: 2011/08/28 [13:52]  최종편집: ⓒ 뉴민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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